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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는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
RevSuh  2008-08-19 16:43:47 hit: 2,786

언더우드 목사는 1881년 뉴욕대학을 거쳐 뉴 브른스위크에 있는 화란 개혁신학교를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은 그 해 7월 미국장로교의 외국선교부에 의해 처음 한국 복음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소년들을 위한 고아원 설립을 시작으로 1886년 첫 세례를 주었고, 1887년에는 첫 교회를 세웠다. 1889년 선교사들의 요구에 맞춰 한국어 문법과 사전을 편찬 출판하였으며, 1893년에는 150곡의 찬송가가 담긴 한국어 찬송가집을 발간하였다. 그는 또 최초로 한국기독교신문을 발간하며 성경번역과 개역작업에 힘썼다.
  
교육분야에서도 적극적이어서 성경번역 및 조선예수교서회사업, YMCA사업, 개신교 복음주의 선교회의 연합공의회, 세브란스 의과대학, 피어슨 기념성경학교, 조선기독교대학 등에서 지도자로 일하였다. 그의 아내 리리아스(Lillias H. Underwood)는 의사로 1883년 3월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하여 제중원의 부인과를 책임 맡아 봉사하였다. 언더우드 목사 부부는 구한말 개화의 격변과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우리 민족의 수난과 운명을 같이하며 신앙과 교육, 문화와 정치, 외교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두 분은 한국교회 신앙의 부모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교육과 세계에 대한 안목을 넓혀준 분들이다. 2세 원한경 박사는 1949년 공산당 테러로 사랑하는 부인을 보내야 했고, 3세 원일한 박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에 재 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고 국제 연합군 정권협상 수석 통역장교로 봉사하였다. 그리고 언더우드家 3대는 모두 서울 합정동 외국인 묘지공원에 잠들었다. 그리고 4대인 원한광 박사는 한미교육위원장으로 4대째 연세대를 통해 봉사해 왔으나 이제는 한국을 위해 언더우드 가족이 해야 할 일을 다했다며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언더우드가는 한국을 위해 땀과 피를 아끼지 않고 119년의 세월을 바쳤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국가가 되었다. 세계 곳곳에 1만 2천명이 넘는 선교사가 영혼구원, 성경번역, 교육과 산업, 의료 및 구제사업 등을 펼쳐가고 있다. 정말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 선교사 중에서는 선교지에서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되돌아와 교회를 개척하는 이들, 선교지의 영혼보다는 자신이나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하나의 발판으로 삼는 이들, 향토병이나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를 포기하는 이들, 선교지의 선임자로 후배들의 진로를 차단시키는 이들, 선교지에 보다는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선교사들 선교지에서 서로 시기와 경쟁으로 흠집내기에 바쁜 선교사들도 있다고 듣는다. 이런 선교사들은 선교사 중에 극소수이리라 믿는다. 그러나 선교지를 위해 아낌없이 피와 땀을 쏟고 대를 이어 그 곳에 뼈를 묻으며 100년 이상 선교지의 교회와 국가운명을 책임지는 선교사가 우리 한국선교사 가운데서도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언더우드가의 사랑과 헌신에 깊은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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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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