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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이

 

 

 

 


일치 오순절파 교리의 비판
RevSuh  2017-03-27 14:28:47 hit: 713

4. 일치 오순절파 교리의 비판

  일치 오순절파의 삼위일체 교리 부인은 똑같은 내용은 아니지만 초대교회 때 있었던 양태론적 삼위일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을 오순절 유니테리안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연합과 하나 되심의 구약 신학에서 양태론적 신론인 단일신론과 유사하게 보인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회의 지도자 멘지스(Dr. Menzies)는 이들의 주장은 새로운 계시로서 고대의 이단의 부활과 다르지 않다고 그는 지적했다.

1) 일치 오순절파의 신학에 대한 반론

  ⑴ 예수님은 아버지나 성령이 아니시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은 아버지와 성령님과 다른 분이시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이시며(요 3:35),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말씀하시며(요 11:41-42), 아버지는 아들을 아시며 아들은 아버지를 아신다(마 11:27).
  성령님에 대해서도 성경은 예수님의 세례 때 그에게 임하셨고(눅 3:22), 성령은 다른 보혜사이시며(요 14:16) 예수님이 보내셨고(요 15:26),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씀한다(요 16:13-14). 성령님은 결코 예수님과 같은 분이 되실 수 없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하시고 운명하실 때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4:46)라고 하신 분이 아닌가?

  ⑵ 예수님은 선재하셨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란 어떤 의미인가?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태초’는 심지어 그 창조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말씀이 계셨음을 의미한다. 말씀은 지혜나 이성 등으로 쓰이기도 했으나, 시편 저자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의 인격적인 말로 묘사했다(시 33:6; 107:20; 147:15, 18; 사 55:10-11). 특별히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보내심을 받은 목적을 성취한 후에는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묘사한다(사 55:10-11).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단지 인격적인 용어로 말하지 않고, 그 말씀이 이제는 참된 인격, 주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음을 말씀하고 있다(요일 1:1; 계 19:13). 주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에 선재하셨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일치 오순절파의 주장처럼 아버지는 영원한 영이시며 아들은 육신이나 인성을 가리키는 말인가? 누구의 아들이란 누구의 소생이란 뜻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이 말은 자주 이렇게 쓰였다. ‘선지자들의 아들들’은 ‘선지자들의 무리 중에서’(왕상 20:35)로 쓰였고 ‘노래하는 자들의 아들들’은 ‘노래하는 자들’을 의미했다(느 12:28).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무리(of the order of God)를 의미하며, 이는 줄지 않은 신성을 주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대 셈족이나 동양인들에게 ‘.....의 아들’이란 말은 본성과 존재의 질에서 같거나 동일함을 가리켰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자격이 없는데도 그가 하나님이심을 주장하고 있다고 이해했다.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으며 그 율법에 따르면 그(그리스도)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요 19:7). 예수님은 그 자신을 하나님으로 동일시하셨고,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으로 그를 죽이려고 했다. 따라서 일치 오순절파가 아들과 아버지를 인성과 신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2) 일치 오순절파의 성경 해석의 문제

  ⑴ 이사야 9장 6절은 예수님이 아버지이심을 증명하는가?
  위 구절에서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아들은 아버지이심을 입증하는가? 성경 어디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한 분이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두 분은 구별된 인격이다(롬 15:6; 고후 1:4; 갈 1:2-3; 빌 :10-11; 요일 2:1; 요이 3).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이 구절의 더 나은 번역은 “영원의 아버지”다. 그리고 그 의미는 “영원의 소유자”를 의미한다. 히브리어나 아람ㄴ의 관습으로는 ‘그것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그것과 소유한 자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힘의 아버지는 강함을, 지식의 아버지는 지성을, 영광의 아버지는 영광스러움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용례에 따르면 이사야 9장 6절의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의미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 그리스도는 영원한 존재이시다.
  고대의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탈굼역 성경에서 이사야 9장 6절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를 ‘영원히 사시는 그’로 번역했다. 고대의 유대인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를 메시아의 영원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비록 아버지에서 구별되신 예수님이지만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불려질 수 있었다. 칼빈도 여기서 아버지란 이름을 창시자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의 교회의 존재를 보호하시며 그 몸(교회)과 개인 신자들에게 불멸을 부여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⑵ 요한복음 10장 30절은 예수님이 아버지이심을 증명하는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이 말씀은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며 같은 인물이란 말인가? 이 구절을 헬라어로 문자적으로 읽는다면 “나와 아버지, 우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아버지와 한 인물이었다면 예수님은 분명하게 두 인격들을 암시하는 제1인칭 복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하나’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hen)는 이 동사에서 인격적인 연합을 가리키지 않고(아버지와 아들이 한 인격이라는 사상) 본질이나 본성의 연합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은 헬라어에서 그 말의 형태가 남성이 아니고 중성인 사실에서 분명하다. 더구나 곧바로 요한복음 10장 30절의 전후에 나오는 동사들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구별하고 있다(요 10:25, 29, 36, 38).
  따라서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한 분이라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이신 면에서 볼 때 한 분이지만 구별되시는 분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역에서의 연합이다.

  ⑶ 요한복음 14장 6-11절은 예수님이 아버지이심을 입증하는가?
  요한복음 14장 6-11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단언하셨다. 그러나 이 구절 역시 아버지와 아들은 존재에서 하나이시지만 그들이 한 인격이란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만일 예수님과 아버지가 한 인격이라면 ‘아버지께로’, ‘나를 통해서’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말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구별된 인격일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할때 답변으로 “어떻게 네가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고 하셨다(참고, 12:45; 13:20). 아버지와 이 연합은 예수님의 말씀(그의 가르치심)과 그의 하신 일들(특별히 표적) 모두에서 나타났다. 사도 요한은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아버지의 말씀으로 그리고 그의 일들을 아버지의 일들로 묘사하고 있다(3:34; 5:23-24; 8:18, 28, 38, 47; 12:49; 5:20, 36; 9:3-4; 10:25, 32, 37-38).

  ⑷ 고린도전서 1장 3절은 예수님이 아버지이심을 주장하고 있는가?
  고린도전서 1장 3절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그런데 일치 오순절파에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곧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리고’라는 의미의 헬라어 카이(kai)가 어떤 구절에서는 ‘even’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헬라어 학자들은 보편적으로 고린도전서 1장 3절의 ‘카이’(kai)는 문맥상 ‘even(곧)’이 아니라 ‘그리고’로 번역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이 한 인격이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평강의 원천이 아버지요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은혜와 평강의 공동 수여자시다.
  ⑸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예수님과 성령님이 한 분이심을 증명하고 있는가?
  고린도후서 3장 17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성령님이시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주는 영이시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주석가들이 영이란 말은 삼위일체의 제삼위이신 성령을 가리킨다고 이해했다. 그러니까 전반절의 의미는 성령은 주님(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그 단어들만 아니라 문맥에도 맞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바울의 관심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에 관한 것이지 삼위일체론의 존재론에 대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울은 주님은 영이시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는 빛과 생명이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그에게 돌아오면 오해의 휘장이 옮겨지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은 생명을 주시는 자가 되셨다. 고린도후서 3장 16, 17절에서 그 영은 생명을 주신다. 이제 주님은(그리스도) 영이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성령이시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3) 일치 오순절파의 삼위일체 반대의견에 대한 비판
  ⑴ 삼위일체는 비논리적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신비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타락한 인간의 지성은 훨씬 더 제한적이다. 따라서 성경은 유한한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본질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사 55:8-9; 롬 11:33; 고전 13:12). 삼위일체의 교리는 믿어야 할 진리이지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 진리가 아니다. 물론 이런저런 예를 들어 삼위일체를 설명하고는 있지만, 그것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아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분명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초이성적인 진리다.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적인 논쟁이 가르쳐 주는 진리는 성경대로 말하고 성경대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비이성적이거나 비논리적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일치오순절파도 확신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마태복음 28장 19절과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그리고 성령의 구별되심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⑵ 삼위일체는 이교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반대
  이교주의가 무엇인가? 우상 숭배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흐려지고 일그러진 결과가 아니겠는가? 앗수리르나 바벨론 등에서 셋이 한 그룹을 이룬 한 신을 믿었으나, 그것은 성경의 삼위일체가 아니다. 그 세 신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 한 신이 아니다. 성경의 삼위일체는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인격이 계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결코 이교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었다. 일치 오순절파는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논거를 빌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일게 한다. 이들 둘은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주장에서 너무도 닮았다. 그들 역시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삼위일체를 성경이 아니라 이교주의의 산물로 보기 때문이다.
  
   ⑶ 교회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아직 교회의 교리가 확립되기 전이어서 각자의 의견들이 다를 수 있었다. 교회의 교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후대 교회가 확립한 삼위일체 교리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일치 오순절파처럼 예수가 곧 아버지시오 성령이시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아버지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된 인격이시며, 아들과 성령님이 역시 구별되신 인격임을 가르쳤다.

  ⑷ 성경에 삼위일체란 나오지 않았다
  일치 오순절파는 성경에 삼위일체란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믿어야 할 교리가 모두 성경에 문자적으로 있는 것을 옮겨 놓은 것은 아니다. 교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가르치는 진리를 요약하고 종합하고 정리한 것이다. 만일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일치 오순절파는 왜 성경에도 없는 하나님의 양태나 표명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
  론 로우즈(Ron Rhodes)는 성경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는 아래 세 가지 증거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증거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만 한 분 참되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씀한다.
  그 대표적인 구절은 이사야 44장 6절과 46장 9절이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물론 신약의 다음 구절들도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다(롬 3:29-30, 16:27; 고전 8:4; 갈 3:20; 엡 4:6; 딤전 2:5; 약 2:19).
  
    ② 하나님으로 부른 세 분에 대한 증거
   성경에는 역시 하나님으로 부른 세 구별된 인격이 계심을 분명히 한다.
    ㈀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성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했다(벧전 1:2).
    ㈁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했다(요 20:28).
    ㈂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성령께 거짓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속이는 일과 같았다(행 5:3-4).
    그밖에도 성경은 세 인격이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지니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다.
    ⚫ 편재하심 : 아버지(렘 23:23-24), 아들(마 28:18), 성령(시 139:7)
    ⚫ 전지하심 : 아버지(롬 11:33), 아들(마 9:4), 성령(고전 2:10)
    ⚫ 전능하심 : 아버지(창 18:14; 시 24:8; 렘 32:17), 아들(마 28:18), 성령(롬 15:19).
    ⚫ 거룩하심 : 아버지(계 15:4), 아들(행 3:14), 성령(요 16:7-14)
    ⚫ 영원하심 : 아버지(시 90:2), 아들(미 5:2; 요 1:2; 계 1:8, 17), 성령(히 9:14)
    ⚫ 진리이심; 아버지(요 7:28), 아들(계 3:7), 성령(요일 5:6)

   ③ 신격에서 한 분 안에 세 인격으로 계심
  마태복음 28장 19절  “그 아버지와 그 아들과 그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에서 정관사(the)를 강조하여 더했다(NASB). 여기서 이름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단수이며 이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신데 그 신격 안에 세 구별되신 분 즉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로벗 레이먼드는 “그 아버지의 그 이름‘(단수), 과 ’그 아들의‘ 그리고 ’그 성령의 이름으로‘ 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단수 이름의 범위 안에서 그들 모두를 결합함으로써 그 세 분의 연합을 주장하며 다음으로는 반복된 관사와 함께 차례로 그들을 소개함으로써 각자의 구별되심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⑸ 성령의 부재는 삼위일체를 반증해 준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나오는 구절에서 성령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아니시며, 따라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세 분에 대해서 함께 모두 언급하고 있는 성경 구절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마 28:19; 고후 13:14). 이는 마치 아들과 딸을 지닌 부모가 아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부모는 딸이 없다고 결론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딸이 있어도 딸에 대해 언급을 안 할 수도 있다.
성령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세 구별된 인격이 계시고 각 인격마다 역할이 다르시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는 아버지만 언급한 경우도 있고, 아들(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언급한 경우도 있으며, 성령만을 언급한 곳도 있다(딤후 3:16). 따라서 일치 오순절파가 성령님의 언급이 없다고 해서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4) 일치 오순절파의 구원론 비판
  ⑴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받아야 하는가?(행 2:38)
   일치 오순절파는 베드로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세례는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에서 ‘.....의 이름으로’는 ‘.....의 권위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따라 세례 받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사도행전 2장 38절은 세례 형식을 의도해서 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훨씬 더 분명한 구절은 마태복음 28장 19절이다. 그렇다면 이 두 구절이 서로 모순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세례를 말씀했을 때 그 말씀의 대상이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다시 말해 그리스도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이 개종하여 세례를 받으려면 먼저 회개해야 했으며, 그때 유대주의의 한 부분이었던 다른 모든 세례로부터 이 세례를 구분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란 말은 그의 권위로 한 의미일 뿐 아니라 세례 받는 자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다는 의미다(참고, 22:16).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말은 마태복음 28장 8-20절의 믿는 자에게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완전한 계시를 포함한다(8:12; 10:48; 19:5). 따라서 이 말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그 백성을 구속하시는 분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세례 형식을 모순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는 세례와 죄사함에 관해서 예수님이 가지신 유일한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4장 38절은 세례의 유일한 형식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세례 형식과 모순되지도 않는다.

  ⑵ 물세례는 구원에 필수인가?
  일치 오순절파에서는 물세례 없이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만 받는 물세례가 죄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유일한 길이므로 그 세례 없이는 구원도 없다고 결론짓는다. 만일 사도행전 2장 38절이 구원을 조건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다른 성경 구절과 모순이 아닌가? 예를 들면, 요한복음(3:16-17; 5:24; 7:38; 20:29)과 사도행전(4:12; 16:31)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지 않는가? 사도행전 2장 38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말씀한다. 마치 세례가 죄사함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세례 자체가 죄를 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회개하고 예수 믿어 죄사함 받은 사람이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례는 죄사함 받은 표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물세례가 구원에 필수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 16장 31절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면서 구원의 방법을 묻는 간수에게 대답한 말씀으로 세례와 구원에 대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거기서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고 그 간수의 권속이 다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세례를 먼저 받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바울과 실라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으라는 복음을 전했고 간수와 그 온 집안이 신속하게 믿었다. 그들은 기뻐하며 즉시 그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결과 저들은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았다. 그리고 그 표로 세례를 받았다. 따라서 성경 어디에도 물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말씀한 곳이 없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⑶ 방언을 말하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인가?
  만일 방언을 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모든 신자는 방언을 해야 한다. 그러나 방언은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일 뿐이다(고전 14:4).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성령의 모든 은사를 독점할 수도 없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선물로 주신다. 신자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3). 성령을 받은 신자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한다. 성령의 열매(성령)가 맺혀야 성령 받은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에 방언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갈 5:22-23). 또 사도행전의 몇몇 구절은 성령으로 세례 받고 충만해졌으나 방언을 했다는 언급이 없다(행 2:37-41; 4:31; 6:3-6; 7:55; 11:24; 13:52).

  ⑷ 거룩을 유지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인가?
  구원받은 신자가 천국에 이를 때까지 성화에 힘써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거룩한 삶을 유지하지 못하면 구원을 잃게 된다는 주장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구원은 은혜이며(엡 2:8-9)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성경에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구절이 신약에 200여 회나 나온다(요 3:15; 5:24; 11:25; 12:46; 20:31).
믿음으로 인한 은혜 구원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경을 대적하는 셈이 된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며, 우리의 행위로 얻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복음인 것은 그것이 율법이나 사람들이 만든 계율을 지킴으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치오순절주의와 정통적 기독교의 차이              

일치 오순절파 정통기독교
하나님의 이름한 하나님(예수), 세 가지 양태 한 하나님, 세 인격들
예수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시다삼위일체의 제2위 신격이시다
아버지아들의 신성을 가리킨다삼위일체의 제1위 신격이시다
아들단지 성육신들 가리킨다영원한 아들이시며 제2위 신격이시다
성령범위양태안에 있는 하나님을 가리킨다삼위일체의 제3위 신격이시다
구원엄격한 요구 조건예수만 믿음으로
물세례예수 이름으로만삼위일체
성령세례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요구됨방언이 요구되지 않음
거룩구원을 유지하는 데 요구됨구원에 따라옴


요약과 평가
일치 오순절파는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임을 믿는다. 성경대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려고 힘쓰며 경건을 매우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세속과의 엄격한 구별을 요구한다. 또 성장하는 교파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할 때 독특한 해석, 다시 말해서 문맥이나 성경 전체를 보지 않고 문자에 집착하는 독단적인 해석을 취함으로써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학(교리)에서 크게 이탈하고 말았다. 신론, 기독론 그리고 구원론이 모두 잘못되었다.
일치 오순절파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다른 이단 종파들처럼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다는 데 있다. 또 경건 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옳았으나 구원의 유지가 경건을 유지하는 데 달려 있다는 잘못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경향은 필연적으로 순수한 복음에서 떠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믿음으로 인한 은혜 구원 대신에 세례와 방언 등을 구원의 필수 요건으로 덧붙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믿음에 경건의 행위를 더한다. 따라서 계율적인 성격의 신앙이 강조되고 있다.
  일치 오순절파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데서는 지극히 이성적이면서, 성경 해석에서는 지나치게 문자적이며 편협한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 점에서 다른 이단 종파들, 특별히 여호와의 증인과 유사점이 없지 않다. 자신들이 발견했다는 특별한 깨달음의 원리나 주장에 따라 성경을 해석한다.  일치 오순절파는 성경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그 해석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다.

제10장 프리메이슨주의
제9장 일치 오순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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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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