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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이

 

 

 

 


오늘날의 현황과 교리
RevSuh  2018-10-31 20:28:35 hit: 16

4. 오늘날의 현황

  더 웨이의 성경 연구 센터는 오하이오의 뉴 녹스빌 근처의 농지 150에이커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 수십 채의 숙소들이 있고, 위어윌의 가까운 추종자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더 웨이의 자산으로는 미 전역에서 위어윌의 말씀을 가르치는 두 개의 학교와 다른 부동산들이 있다.
  두 개의 학교는 다른 교회들로부터 산 것인데, 그 하나는 전에 장로교 대학이었던 캔사스 임포리아의 더 웨이 대학이며, 다른 하나는 전에 로마 가톨릭의 헬스스파였던 인디에나의 로마 시(Rome  City)에 있는 곳이다.
  회원 수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지만 1977년에 추정하기로는 50,000명의 활동적인 회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풍성한 삶을 위한 능력’ 코스를 이수한 자들이다. 선교사들은 50개의 모든 주에 있으며, 51개의 외국에 있다.  더 웨이의 성장은 WOW 대사들이 적극적으로 전도의 헌신하는 데 있다.

5. 교리

1) 성경
  더 웨이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어떻게 올바르게 믿어야 할지, 어떻게 긍정적으로 믿어야 할지를 가르치는 교리로서 유익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정확하다. 성경은 결코 믿지 않는 자들이나 불가지론자 그리고 이교도를 위해 기록되지 않았다. 성경은 해답을 찾으려는 남성과 여성들을 위해 쓰여졌다. 이렇게 더 웨이는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주장한다. 그들은 원본에는 역사적, 과학적 혹은 신학적인 오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본에 맞는 정확한 번역은 흠정역(The King James Version)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해석은 새로운 빛으로 해야 하는데 위어윌이 바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그 빛이라고 한다. 그는 추종자들에 의해 바울 사후에 하나님이 일으키신 제2인자라고 인식되고 있다. 그는 성경의 정확한 해석자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말하는 바를 의미하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말씀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권위 있는 본문들로 사용하고 있는 시리아 페쉬타(The Syriac Peshitta) 역을 좋아하지 않는다. 월터 마틴(Walter Martin)은 그 이유를 위어윌이 본문 비평의 일치를 무시하고 신약이 원래 아람어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아람어 형식은 그리스도 때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위어윌의 경향은 성경에 관한 세대주의적 견해를 따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블링거(E.W. Bullinger)의 세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그 견해에 의하면 구약은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졌으며, 복음서들은 이방인들을 위해 쓰여졌고 구약의 전승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어윌은 구약과 복음서는 주로 현대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며, 다만 교육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롬 15:4)고 한다. 또 개인들에게 보내는 바울 사도의 서신 중에서는 하나도 기독교인들에게 권위 있는 것이 없다고 본다. 그는 다만 교회들에게 쓴 바울의 서신들이 중요한데, 예를 들면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데살로니가전후서가 그것들이라고 한다. 그 중에 에베소서가 위어윌에게는 특별히 중요하다. 사도행전은 옛것에서 새것으로 연결짓는 시대의 책이라고 한다.
  그는 오순절전에 쓴 책들은 우리를 위해 쓴 것이 아니며, 성경 번역의 가장 큰 오류는 사복음서를 신약 안에 두는 것이라고 한다. 복음서들은 논리적으로 구약에 속한다는 것이다.
  위어윌은 역시 람사(George M. Lamsa) 박사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약이 아람어로 쓰여졌다는 그의 신뢰 때문이다.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아람어로 말했으며, 바울은 아람어로 그의 서신들을 썼다. 그들은 신약의 저작들을 초대 기독교인들과 접촉하려는 헬라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헬라어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중해 연구와 고대의 연구에 전문가이며 동방 아람어의 전문가인 야마우치(Dr. Edwin Yamauchi)는 신약성경은 아람어가 아닌 헬라어로 쓰여졌으며,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 신약이 아람어로 쓰여졌느냐 아니냐를 논증하면서 람사는 동방 시리아의 아람어로 논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아람어 형식은 예수님 당시에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실제로 제3세기까지는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야마우치는 동방 시리아 아람어와 초기 팔레스틴 아람어 사이에는 유사성에 근거한 문헌적인 논증을 불가능하게 하는 어떤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위어윌의 신약성경이 아람어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신약성경의 원본이 아람어로 쓰여졌다는 잘못된 가정에서만이 아니라 성경의 해석에서도 정확한 해석자로 자처하지만 성경 해석의 일반 원칙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일반적인 해석의 원칙은 성경 본문의 언어와 문법 그리고 역사적인 배경과 다른 성경 구룹과의 관계를 참고하되 그 구절의 문맥에 일치되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어윌은 다른 이단 종파들처럼 성경을 그의 교리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는 흠정역 성경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하지만 자주 그것에 괄호를 만들어 단어들을 더한다. 그 이유는 그 자신의 헬라어 본문 해석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만일 그의 헬라어의 지원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는 그것을 아람어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는 “그 말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옳게 나누어진다면 우리는 참된 말씀을 소유한다. 말씀이 잘못 나눠진다면 우리는 오류를 범한다. 우리가 말씀도 잘못 나눌 때 우리는 사단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 했다.
  따라서 더 웨이의 성경관은 신앙의 진술에서는 역사적인 정통주의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대주의적으로 성경을 구분하여 복음서를 구약으로 보며, 신약성경을 아람어로 썼다고 단정한다. 그뿐 아니라 위어윌은 성경 해석의 원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과 주장에 따라 성경 말씀을 나누며 그의 주장에 짜맞춰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2) 삼위일체
  위어윌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성경의 교리로 믿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여호와의 증인처럼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고대 이교적인 사상이라고 한다. 그는 “기독교의 설립 오래 전에 삼신 사상이나 세 인격 안에 있는 한 신 사상은 고대 종교에서 일반적인 믿음이었다. 비록 이런 종교들 중에 다수는 많은 적은 신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세 인격으로 구성된 한 분 최고의 하나님이 있었다는 구별된 지식이 있었다. 바벨론 사람들은 삼인조에 해당하는 한 신 안에 있는 이 세 신이 이제는 현재의 한 분 안에 있는 세 분을 믿는 자들의 상징임을 소개하는 같은 삼인조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렇게 위어윌은 삼위일체를 이교의 삼신론으로 부르면서 둘 다 같은 원천에서 온 사상이라고 한다. 이교도에서 보다 먼저 삼신을 믿었으니 그것이 기독교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위어윌은 이방 문화에 의한 신앙의 삼신론 형태에 관해 바르게 소개하지 않았다. “저들의 삼신 사상이나 신들의 연합체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크게 다르다. 그들은 신들이 다수나 그들 셋은 주신들로 믿었다. 다른 종교들도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 그리고 아들 하나님을 믿는다. 그들은 한 하나님이 세 중요한 속성이나 양상 혹은 형태를 지녔으며, 그런 것은 때로는 다른 신들이나 주어진 다른 이름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계시는 고유한 것이다. 삼위일체에 의하면 한 분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질 안에 영원하고 구별되는 세 인격들이 계신다(눅 3:21, 22). 아버지(벧후 1:17), 아들(사 43:10; 요 1:1, 14) 그리고 성령이시다(행 5:3, 4). 이 세 분 인격들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마 28:19). 기독교는 복수의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 그분만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사 43:10; 45:22). 이 한 분 하나님이 세 영원하신 인격으로 존재하시는데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시다. 그리고 세 분 인격은 서로 다르시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시며, 아들은 성령이 아니시다. 역시 성령은 아버지가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격들 각자는 한 신격에서 동등하시다.
  성경의 하나님이 한 분이시란 말씀(신 6:4; 막 12:29)에서 ‘하나’란 뜻의 히브리어(echoid)는 수학의 하나가 아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그 말은 그들이 한 육체가 되었다는 합성의 하나다. 거기서는 남자와 여자가 한 인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시 위어윌은 히브리어의 하나님이란 말 엘로힘도 잘못 이해했다. 엘로힘은 복수 명사이면서 단수 동사를 사용했다. 이것 역시 합성의 하나임을 가리키는 데 쓰였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는 말씀은 인격의 복수를 암시하고 있다. 위어윌에게 하나님은 한 분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 아니며, 성령도 아버지에게서 분리된 인격임을 믿지 않는다. 또 그는 대문자 성령과 소문자 성령 사이를 구별한다. 대문자 성령은 아버지로 인격에서 같으며 아버지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소문자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적 능력이므로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 성령은 인격이 아니며 물론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대한 위어윌의 주장은 (1) 성령이신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아들 그리고 (3) 성령(소문자) 하나님께서 오순절 날에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사였다.
  위어윌은 삼위일체를 부인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든다.
1) 역사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가 아닌 종교들에서 구성되었으며 정치적인 편법 아래서 성직자들에 의해 인증되었다. 다시 말해서 삼위일체 교리는 콘스탄틴 황제의 권세에 의한 A.D.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의 소속 감독들에 의해 제정되었다.
2) 성경적으로 삼위일체의 형식이 나오는 곳은 요한일서 5장 6-8절과 마태복음 28장 19절인데 요한일서엔 초기 사본에 나오지 않는 발췌된 말들이 있다. 즉 ‘하늘이나 땅에서’라는 말이 첨가되었다. 마태복음에서는 원래 ‘내 이름으로’의 자리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가 삽입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이 후대의 어느 때에 더해진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반대를 위한 이론들은 그의 일관되지 못한 성경 해석과 역사적인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 과정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바른 교리의 정립을 위한 교회의 회의들은 그 시대의 요청이었으며, 교리의 형성 과정에서는 이견의 불일치로 논란이 적지 않았으나, 그 교리들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는 각자의 서로 다른 의견들을 말씀 앞에서 접고 말씀에 순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중요한 교리 작성에 대해서는 후대의 모든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보고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3) 하나님의 속성
  위어윌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서도 오해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은 그가 하려고 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만일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지 않는다면,
그는 그것을 원치 않으시거나 하실 능력이 없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의 능력은 항상 하나님의 원하심과 같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지만 능력이 없다고 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는 능력이 있으시지만 원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이것은 사람에게나 진리일 것이다. 사람은 능력이 있으나 자원함이 부족할 수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원함도 있으나 능력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항상 그의 자원하심과 동등하다. 그것들은 항상 조화된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으신 것은 그가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그가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원하신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3:9). 이렇게 하나님의 원하심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며 아무도 멸망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지는 않으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어찌 된 것인가? 모든 죄인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죄인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과 동일하게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자칫 하나님이 능력을 제한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또 위어윌은 하나님의 활동은 사람의 믿음으로 제한된다고 본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그녀 안에서 영혼-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은 첫 번째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위어윌의 이런 주장에서 우리는 그의 논리의 모순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동정녀 탄생을 원하셨다면 더 일찍 예수님이 탄생하실 수 없었는가? 마리아의 믿음 때문이었는가? 하나님의 원하심 때문이었는가? 만일 위어윌의 주장대로라면 마리아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원하는 일을 하셨어야 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 다만 그의 속성에 일치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믿음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마 19:26; 눅 1:37; 3:8). 하나님의 능력은 그가 실제로 하신 것만 하실 수 있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뜻을 모두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4) 그리스도
  위어윌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을 부인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는 한 인격만이 하나님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변호한다. 그는 그 책에서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세우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 아들 하나님이나 하나님 자신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요한복음이 신약의 다른 어느 책들보다도 분명하게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의 무자격한 신성에 관해서 단언한다고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시며, 너희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하나님으로 된 사람이었기에 점과 흠이 없는 완전한 제물이 되실 수 있었음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위어윌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른 곳과 하나님으로 부른 곳은 50대 4의 비중이므로 그 진리가 명백하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신약성경은 4회만이 아니라 더 많은 곳에서 단언하고 있다.
  위어윌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선재를 부인한다. 우리가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존재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그의 예지)과 함께 계셨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이 차이점이 아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은 한 분이 아님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위어윌은 예수님의 선재하심이나 하나님이심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도 자기 주장에 맞도록 잘못 해석한다. 그 예로 요한복음 10장 30절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 말씀은 이렇게 해석한다. ‘태초부터 한 분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설정된 것이었으나, 예수님이 지상에서 그의 아버지를 말씀한 이 구절의 문맥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은 목적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뜻과 그 일을 마치신 것이다“. 또 요한복음 1장 1절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고 말씀한다. 이에 대해 위어윌은 말씀은 그의 지식에서만 아버지와 선재했을 뿐이며, 예수는 출생하셨을 때 존재로 들어오셨고 예지가 실제가 되었다고 한다.
  또 예수님은 그 시간을 모르며 순종으로 배우셨다는 마가복음 13장 32절과 히브리서 5장 8절을 언급하므로써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예수님의 제한된 지식을 대조시켜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12장 32절을 들어 인간 예수와 영으로서의 하나님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낳으신 아버지의 말씀이기보다 창조된 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즉 인간이지 하나님은 아니라고 한다. 이런 위어윌의 주장은 자신의 뜻에 짜맞추는 식의 성경 해석이다. 성경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50회 말씀하고 하나님으로 말씀한 곳은 단지 네 곳뿐이므로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횟수가 곧 진리의 진위를 가리는 기준이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5) 동정녀 탄생
  위어윌과 더 웨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다. 위어윌은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암소가 황소에 의해 임신된 것과 아주 같은 방법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리아의 처녀성도 부인하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임신한 후에 출산 때까지 요셉과 성적인 관계를 지속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잉태에 관해 위어윌은 누가복음 1장 35절을 인용한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그의 의하면 여기서 ‘덮는다’는 말은 영어로 ‘to Cover’이다. 따라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라는 것인데, 동물의 세계에서 황소가 암소를 덮는다고 말할 때 이는 임신을 위한 성적인 자세를 의미한다. 같은 의미가 인간들 안에서도 분명하다는 것이다.  
위어윌의 주장은 마리아와 성령 간에 문자적으로 육체적인 성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임신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성령이 정액의 방법으로 예수의 피 안에 영혼-생명을 기증했다. 그의 동맥과 핏줄 안에는 죄 없는 영-생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는다’는 말이 그런 의미인가? 이 말은 비유적인 의미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학자들은 출애굽기 40장 35절의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광야의 성막을 덮은 것’과 같다고 본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이 창조적 능력으로 활동하신 것을 가리킨다. 구약에서 이 말은 세기나(the Shekinah) 구름이 성막에 머문 것이나(출 40:34-35; 민 9:18; 10:34) 그의 백성을 보호하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켰다. 그리고 누가복음 9장 34절에서 이 단어는 제자들을 덮은 변형의 구름을 가리켰다. 따라서 ‘덮었다’(그늘지게 했다)는 말은 그의 백성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신 임재를 가리켰다.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은 덮으시는 성령님은 보호만 하시지 않고 창조도 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이 구절을 위어윌처럼 보는 것은 본문을 신화나 신과 인간 사이에 자녀를 낳는 이교적인 관점에서 잘못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몸은 더 이상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어찌 영적인 존재와 육체를 지닌 인간이 성적인 관계로 자녀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위어윌은 더 나아가서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나서 출산 때까지 요셉과 부부생활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 잉태할 당시에는 처녀였으나 예수님을 낳을 때는 이미 처녀가 아니었다고 한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 이론은 신학적인 가설이며 잘못된 교훈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마태복음 1장 20절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네 아내를 취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가 그녀와 함께 남편과 아내로 산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하나님에 의해 임신했을 때 처녀였으나, 요셉이 그녀를 취했을 때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니었다고 한다. 신적 임신이 마리아를 더 이상 처녀가 아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25절 말씀은 요셉에게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말라”는 말씀(20절)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분명히 한다. 24-25절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라고 하여 마리아가 성경대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은 낳을 것”이란 말씀대로 되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 구절이 의도한 것은 마리아가 이미 임신한 것으로 인해서 아내로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는 것이며,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를 낳았을 때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법적으로 예수는 그의 아들이면서 역시 다윗의 후손임을 가리킨다.

6) 예수님의 십자가
  위어윌은 우리는 반드시 완전한 희생은 인간이 되어야 가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72시간 동안 죽음에 있었음을 말씀한다. 하나님이 죽을 수 없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그는 알파와 오메가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위어윌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한다. 여기서도 동일한 그의 입장이 잘 표명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을 엄격하게 구별짓는다. 성육신 전에는 하나님이셨지만, 성육신 후에는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을 때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이심을 포기하신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지만 신성과 인성의 두 성품을 지니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그의 몸과 인성이 죽으신 것이지 신성인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다. 그의 신성은 영원하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시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시며 처음과 마지막이시다.
예수님에 대해 신약은 분명한 신성의 용어나 호칭으로 서술하고 있다. 예수의 이름은 모든 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주님이시며(빌 2:9-11), 인자로서 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주장하셨고(막 2:28), 죄를 용서하시는 권위가 있음을 주장하셨다(막 2:1-12). 역시 그는 영광의 주로 올리우셨고(약 2:1), 기쁘게 예배를 받으셨을 뿐 아니라 제자 도마에게는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시라”(요 20:28)는 고백을 받으셨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하나님의 충만이 거하신다고 했다(골 1:19). 5세기 칼게톤 회의(A. D. 451)에서는 “예수는 참으로 사람이시지만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두 성품, 신성과 인성은 섞이지 않고 혼동이 없으며 분리가 없고 나누이지 않는다”고 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이실 뿐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의 죽음이 우리 죄를 대속할 수는 없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의 구속 사역과 그의 신성 사이에 근본적인 연관를 강조하셨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했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느니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알지 아니하면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여기서 ‘내가 그니라’ 란 말은 칠십인역의 신성의 문체(비교, 사 43:10)의 유사한 표현을 따라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인간 이상임을 믿지 않는 한 결코 구원하는 신앙의 그 신앙으로 그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아들 하나님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인류를 구속하실 수 있었다.  
  위어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관된 사건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가 네 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두 악인에 두 강도를 더해 네 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서 마태와 누가에 의한 이야기를 보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는 네 명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이야기해 주는 복음서의 내용은 한결같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세 사람이며, 예수님은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셨고 두 강도는 좌우편에 달렸음을 말씀해 준다.
  더구나 요한복음 19장 32, 33절에 의하면 십자가 처형을 담당했던 군인들이 예수의 시체를 내어주기 전에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다리를 꺾을 때 첫 번째 사람과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었고,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으므로 그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했다. 만일 거기 예수님 외에 네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다면 왜 세 번째나 네 번째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는가?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는 두 명의 강도였으며, 모두 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다.

7) 성령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위어윌은 성령의 인격성이나 신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성령님과 아버지 하나님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분으로 본다. 이는 3세기에 있었던 이단 양태론과 유사하다. 양태론자들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 단지 하나님의 한 인격의 다른 양태나 표명이었다고 주장했다.
  위어윌은 아버지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영이시고 그가 성령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은 곧 성령이시다. 그가 성령에 대한 오해는 성령을 주시는 이와 주신 은사 사이를 바로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따라서 주시는 자와 은사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별을 바로 하지 못하므로써 중생에 대한 이해처럼 성령론 분야의 연구에 혼란이 왔다는 것이다. 수여자 성령으로부터 온 은사는 ‘퓨뉴마 하기온’ 곧 ‘거룩한 영’(Holy Spirit)이요, 위로부터 온 능력이요 영적 능력이며 주어진 능력이다. 이 능력은 그 본질과 대조적인 영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이신 것만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주는 자에게서 온 선물은 필연적으로 거룩하며 영이다. 따라서 위어윌은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거룩한 영은 그 성령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은사라고 본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은사는 성령인데 고유한 영적 능력이요 두나미스요 높은 데서 온 능력이라고 한다. 이 은사는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요 영광의 소망이며 그것의 모든 충만과 함께 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그 성령님 대신 성령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영을 곧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다.
이렇게 위어윌은 성령의 개별적인 인격을 부인하며, 성령은 곧 하나님이시고 그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선물도 성령(소문자)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위어윌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그의 주장에 맞는 성령론을 전개하고 있으며, 그 결과 대속의 성령을 주신 자와 선물로 성령을 양분시켜 혼란을 자초하고 있다.
  성경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단언한다. 성령은 인격이시며(행 13:2; 히 3:7) 아버지와 아들과는 구별되는 인격이시다(눅 3:21; 22:6; 마 28:19). 그의 신성에 대해서는 이사야 6장 8-10절 ; 사도행전 5정 3, 4절 ; 28장 25-27절 ; 예레미야 31장 31-34절 ; 히브리서 10장 15, 16절 ; 베드로후서 1장 20, 21절 ;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8) 인간
  위어윌은 인간이 원래 몸(육체)과 영(호흡이나 생명) 그리고 혼(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의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락으로 사람은 완전히 그의 영을 상실했으며, 몸과 혼을 지닌 동물처럼 되고 말았다고 본다. 사람의 혼은 타락하고 부패했으나 아직도 그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본다. ‘영은 사라졌다. 영은 죽었으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그들의 모든 영적인 관계가 상실되었다. 바로 아담과 하와의 때로부터는 다른 동물처럼 몸과 혼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음에도 여전히 인간이지 인간 이하가 아니다. 프랜시스 쉐퍼는 “타락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지만, 그것이 다른 피조물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인간의 속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타락한 인간이라 해서 인간 이하의 그 무엇은 아닌 것이다”라고 했다.

9) 죽음
  위어윌은 타락한 후에 인간은 몸과 혼을 지녔으나 영이 없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본다. 인간은 그가 영을 소유하지 않았으므로 죄 중에 잉태하여 죄 중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인간은 누구나 영은 없이 몸과 혼으로만 존재하는가? 그에 의하면 오순절 날 신자들에게 성령(소문자)의 선물을 주셨다고 한다. 물론 이 성령(holy spirit)은 성령님과 구별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처음부터 몸과 영으로 되어 있었으며 타락한 후에도 변함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다.
욥기 32장 8절에서는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the Spirit)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신다’고 했다. 시편 32편 2절에서는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영어성경(NIV)에서는 ‘마음에’를 ‘그의 영’에(In Whose Spirit)라고 번역했다. 누가복음 1장 47절에서는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이라고 했는데 ‘내 마음’은 ‘나의 영’이라(my Spirit)이라고 번역했다(NIV).
여기서 사람의 영은 오순절 전에도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며, 위의 구절들은 인간이 실제로 동물들로부터 본성에서 구별된 영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요한복음 20장 21, 22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하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만일 위어윌의 주장대로 성령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로 타락으로 상실한 성령이라면, 오순절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소문자)을 주신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위어윌은 성경의 삼위일체를 부인했기 때문에 삼위일체와 연관된 모든 성경적인 진리도 부인하거나 비성경적인 주장으로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위어윌의 오류는 시작이 잘못되면 결과는 물론이고 그 과정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더 웨이에서는 죽은 자는 무의식 상태이며 영혼이 잠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이 모두 죽은 자는 의식이 있다고 말씀한다. 전도서 12장 7절에서는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했다. 또 3장 20절에서는 다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지만, 21절을 보면 “혼은 위로 올라간다”고 했다. 물론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후에도 생이 있으며 죽음도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사후의 생을 지시해 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 생령은 다시 그것을 주신 창조주께로 간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런데 여기 ‘위로’(above)라는 말의 개념은 하나님의 주권과 엄위(비교 5:2)를 위해 쓰였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아마도 죽음에 뒤이은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다루신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구절은 육신의 몸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영혼은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끝이 아니며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 줄 것이다.
  이 점은 신약에 와서는 훨씬 더 분명해진다. 고린도후서 5장 6-8절이나 빌립보 1장 23절은 모두 몸은 죽지만 영은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다고 말씀한다. 바울은 사후의 생명 때문에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훨씬 낫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그의 영혼이 이 지상의 생명에서 떠날 때, 그것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부활의 날까지 존재에서 나가는 것을 의미하거나 잠을 자러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참고, 시 16:11; 17:15; 마 8:11; 막 8:11; 눅 16:25; 요 17:24; 고전 13:12, 13; 고후 5:8; 히 12:23; 계 8:10; 24:4). 그것은 즉시 구주와 복된 교제를 즐기는 것이다.

10) 구원
   더 웨이는 구원은 육체적 믿음의 고백과 궁극적으로는 방언을 말함으로써 보장된다고 한다. 위어윌은 사람은 그의 입으로 새로운 주님-예수 그리스도 - 을 고백할 때 주인이 바뀌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위어윌은 방언을 구원을 위한 중생의 표로 주장한다. 사람은 중생하고 성령으로부터 온 그 은사로 충만해지며, 그 성령의 은사는 항상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방언이 중요한 것은 참다운 예배의 받아들일 수 있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예배하기 위해 우리는 성령의 표명이 있게 해야 하는데, 참 예배를 낳는 성령의 표명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방언이 사람이 중생한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예로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으면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항상 방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옳지 않다. 개종과 성령을 받음에 항상 방언이 따르지는 않았다(행 8:14-17, 사마리아의 개종기사). 또 사도행전 9장에는 바울이 성령을 받고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으나 방언을 하지 않았다. 방언은 후에 했다(고전 14:18).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예배를 참되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성경은 예수님의 지체로서 교회는(고전 12:7-10) 교회 공동체의 선을 위해 성령의 은사들이 주어졌는데 어떤 이에게는 지혜를 다른 이에게는 지식을 주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양한 은사는 모두 같은 한 성령이 그가 원하시는대로 개인들에게 필요한 은사로 주신다(12:11). 결론적으로 바울은 모두 사도겠느냐? 모두 선지자겠느냐? 모두 치유 은사를 소유하겠느냐? 모두 방언으로 말하겠느냐(12:29-30) 하여 성령의 모든 은사를 다 받은 사람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방언이 중생의 표요 참 예배를 가능케 한다는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는 구원에 대한 위어윌의 이해다. 그는 구원은 사람이 하나님 혹은 사단에게서부터 영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 영적인 아버지가 있음을 말씀한다. 씨를 위한 두 가지 가능한 원천은 하나님 곧 우리 주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이 세상의 신 마귀다. 이렇게 사람은 영적으로 이 두 아버지 중 어느 하나에게서 태어나게 된다.
  몸과 혼의 인간은 평생에 결코 두 씨 중에 하나로 중생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있다. 사람은 항상 선택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더 웨이에서 사람은 마귀의 자녀가 되거나 고아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고아들에 관해서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더 웨이의 구원관만은 분명한데 타락으로 상실한 영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어디에서도 가르치는 사상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을 구원의 관점에서 셋으로 구분짓는 것도 잘못이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두 가지 운명, 다시 말해서 구원과 멸망, 천국과 지옥이 있을 뿐이다. 제3의 운명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 외에 제3의 고아는 없다. 구원은 죄의 문제이지 영의 문제가 아니다.
  위어윌은 또 하나님께로 난 자,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로 개종한 사람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영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락한 몸과 혼에서만 죄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위어윌은 사람을 몸과 혼과 영으로 삼분한다. 게다가 몸과 혼은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영은 범죄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 말은 예수를 믿어 영을 선물로 받게 된 신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구분을 모른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몸이나 혼의 문제가 아니라 몸과 혼의 전인적인 문제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죄사함 받아 죄에서 구원받은 신자도 죄를 짓는다. 그것은 타락한 아담의 죄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신자도 죄를 지을 수 있으며, 실제로 죄를 짓는다. 따라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써 용서받아야 한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신자는 천국 가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지만, 육신을 쓰고 죄악 세상을 살아가는 한 알게 모르게 죄를 짓는다. 따라서 좀 더 중요한 것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이다(요일 1:8-9).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이며 영접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믿음의 구원이요 은혜의 구원이지 사람의 행위나 공로의 구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의 무상으로 주시는 충분한 은혜를 받기 위해 그에게 나오기를 원하신다(마 11:28-30; 요 3:16). 입술의 고백(엡 2:8-10), 그리스도에 대한 공적 헌신(롬 4:1-3; 23-25), 방언(고전 12; 14; 행 10장) 등은 사람의 구원을 인치는 것이 되지 못한다. 방언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은 방언은 믿는 자,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위어윌은 성령을 받는 길은 선행이나 기도로 번민함이나 개인의 공로가 아니라 차라리 믿는 데 따른다고 한다. 그는 성령의 은사가 9가지로 명시된다고 한다.  그것들은 (1) 지혜의 말씀  (2) 지식의 말씀  (3) 믿음  (4) 치유의 은사  (5) 기적  (6) 예언  (7) 영 분별  (8) 방언  (9) 방언 통역이다.  이런 성령의 은사 중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가장 강조된다. 그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내적 실제 세계의 감각에서 신자의 외적 표명이며 성령의 능력의 임재라고 한다. 또 방언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길이며 그리스도가 어느 형편에서나 우리 안에 계시는 증거라고 한다.
  그는 방언을 말하는 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역사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누구나 연습할 수 있는 단순한 기술적 과정이라고 한다. 방언을 하는 방법으로 그는 “입을 크게 벌려라. 숨을 들이마시면서 성령의 충만으로 채워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할 때 입술과 목구멍과 혀를 움직여라. 생각나는 것에 주의하지 말라. 그저 말하라. 귀에 들려오는 말이 무엇이든 하나님을 칭송하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그 말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거짓 방언, 사탄이 주는 방언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런 가정은 사악한 생각이며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 연습이나 어떤 수단을 통해서 습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1) 종말론(사후의 상태)
  더 웨이에서는 참 신자가 죽을 때 직접 주님의 임재로 가지 않는다고 한다. 차라리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영이 잠자는 상태로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불신자들은 죽음에서 멸절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문자적인 지옥 같은 것은 없다고 본다.

12) 율법과 은혜
  위어윌은 크리스천이 더 이상 있지도 않은 율법 아래서 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안식일만을 지키는 것은 안식일의 노예라고 한다. “이런 율법들은 결코 교회에 주어지지 않았다. 신자들은 예배의 한 계율적인 날에 매이지 않는다. 전통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의 빛의 진리에 대해 눈멀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역시 그는 세례도 크리스천을 노예화시키는 율법의 다른 국면이라고 한다. “물세례는 참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지만 이스라엘과 그 왕국만을 위한 것이며, 다만 제한된 시간만을 위한 것이었다. 오순절 후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물세례의 유익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이 주어졌다.....중생하는 것은 안에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다. 그는 영광의 소망이시다. 그는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 이것이 영적 세례다....그 안에서 우리가 완전함에 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물세례가 구약의 이스라엘을 위해 세운 것인가? 위어윌이 그의 주장대로 말씀을 구분짓는 것이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 사실을 감안할 때, 그는 그 자신의 그런 원리를 성경의 몰이해로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더 웨이는 정통 기독교와 무엇이 다른가?                  

더 웨이 정통 기독교
성경 오순절 전에 쓴 성경은 유대인에게 해당된다고 봄 신구약 66권이 모두 우리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봄
하나님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며 성령의 구별된 인격을 부인함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함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심
성령예수님은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심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이신 인격적이며 구별되시는 하나님이심
  동정녀의 탄생하나님 아버지이신 성령님과 마리아 사이의 자연적인 관계로 태어나심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임
구원타락으로 상실된 영을 회복하는 것임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에서 구원 받는 것임
방언중생의 표요 참 예배에 필수적임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임


13) 풍성한 삶
  위어윌은 더 웨이에 와서 ‘풍성한 삶을 위한 능력’의 과정을 마치게 되면 풍성한 삶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마음이 새로워짐으로 풍성한 삶을 위한 자유처럼 죄와 병듦 그리고 패배에서 자유하게 된다고 한다.
  “풍성한 삶이란 당신이 모든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노예 됨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며, 빈곤, 병듦 그리고 허약한 몸에서 구원되는 것이고, 생명과 활력과 마음의 기쁨이 흘러넘치게 되는 것이다. 정죄와 자기 경멸에서 구조되고, 마약과 성적 학대에서 나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깨어진 결혼을 회복하게 되며 세대의 차이가 없는 하나 된 행복한 가정을 누릴 수 있다. 만일 당신이 풍성한 삶을 위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면, 당신은 자존감을 얻게 되며 적절한 수입보다 더 많은 수입이 보장되는 일을 하는 만족을 누리게 된다. 당신은 우울증, 낙담, 실망을 이길 수 있고, 사랑과 기쁨과 참된 평화를 소유할 수 있다. 날마다의 삶에서는 항상 긍정적인 소망만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의 삶에는 새로운 목적이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충분하고 정확하게 가르침을 받을 때 이제까지 지녀왔던 모든 문제들은 극복될 수 있다.
  더 웨이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바라고 소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약속한다. 정말 장미빛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번영의 복음을 선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을 마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든 열쇠을 얻어 성경에 대해 눈이 열리게 되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이 과정의 수업료는 1968년에는 코스당 20불이던 것이 65불, 그 다음에는 85불이 되었다가 마침내 100불이 되었으며, 상급 과정은 250불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액수가 그 과정의 수업료가 아니라 헌금이라고 한다. ‘풍성한 삶을 위한 능력’ 은 15과로 되어 있으며 아래와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⑴ 세상에 있는 가장 위대한 비밀(믿는 것과 받는 것은 동등하다)
⑵ 하나님이 영감하신 말씀(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감동하신 것이다).
⑶ 말씀의 완전성(받아들이고 지니고 전하라)
⑷ 어떻게 말씀이 그 말씀을 해석하는가(모든 성경은 성경을 해석한다)
⑸ 교회-신부-몸(이스라엘-율법; 유대인과 이방인 -은혜)
⑹ 감각의 싸움(감각 대 신앙)
⑺ 몸, 혼, 영(하나님은 영이시다)
⑻ 새로워진 마음-아들 신분의 권리들(구원에로의 회개)
⑼ 주는 자와 선물(성령 하나님 그리고 주는 자-하나님이 선물로 성령을 주신다)
⑽ 점수-5:0(말씀은 말씀하신다-방언, 행 2:8-10, 19)
⑾ 표현의 유익과 사용(표현에서 새로워진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⑿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셨고 말씀 그것을 정하셨다(방언의 표현)
⒀ 나는 할 수 있다(하나님의 은사-주어진 능력: 그 행동은 표현이다)
⒁ 교회에서 표현의 사용법(하나님의 영은 이제 당신의 영인 당신 안에서 그의 창조를 가르치신다. 당신의      
    영은 당신의 마음을 가르치며, 당신의 행동하는 감각의 영역에서 표현된다)
⒂ 예언: 표현들의 관계(방언의 종류-방언의 통역-예언-믿음, 기적, 치유들)

  이상의 전 과정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한다. 역시 방언을 하는 것이 모든 중생한 신자를 위한 것임이 강조되며, 위어윌에 따르면 사람이 방언을 할 수 있게 될 때 구원과 마음의 새로워짐이 완성된다. 풍성한 삶이란 무죄함, 성공, 행복, 그리고 건강이다.

요약과 평가

어느 이단 종파나 그렇듯이 더 웨이도 한 사람 설립자 위어윌의 신앙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면에서 더 웨이는 한국의 구원파와 유사점이 없지 않다. 구원은 깨닫고 아는 것이며, 구원받은 사람은 범죄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데 웨이는 구원이 자유와 풍성한 삶을 약속한다고 강조하는데, 이 점에서 구원의 축복을 현재 이 세상에서도 누릴 수 있음을 일깨워 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원의 결과가 세상에서의 성공으로 귀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더 웨이의 신학은 번영의 신학이다.
  더 웨이의 문제점은 구원이 반드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신앙은 볼 수 있게 나타나는 축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방언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것이 중생과 구원 및 예배의 핵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방언이 구원의 증거가 되다 보니 모든 구원받은 신자는 이 세상에서도 그 축복을 누려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구원의 축복이 세상의 축복으로 표명되면서 건강, 번영, 성공 등 모든 문제의 해결로 인한 기쁨과 평안을 주장해서 십자가 없는 영광의 복음이 되고 말았다. 더 웨이는 한 개인의 체험을 말씀과 역사적 신앙의 전통보다 앞세우면서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부인 내지는 이단적인 사상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더 웨이는 삼위일체, 예수님의 신성, 성령님의 인격과 신성, 은혜와 구원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까지 모두 부인한다. 더 웨이는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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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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