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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이

 

 

 

 



  제목 :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본문 : 요 8:2-11
RevSuh  2015-11-25 12:57:31, 조회 : 1,977, 추천 :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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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2-11)(061702)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병자도 고치시고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기도 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기도 하셨다. 또 12명의 제자를 불러 가르치셨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복음을 위함이었다. 천국복음을 온 땅에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죄인 구원이다. 과연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자신이 친히 복음이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셨고 그 복음을 전파할 제자 양육이었다.
그런데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이 은혜의 복음, 좋은 소식 전파에는 적지 않은 반대와 장애들이 있었다. 사탄의 방해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반대와 장애는 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오늘 본문의 사건도 그 중에 하나이다. 이 본문은 우리말 성경에도 괄호안에 들어 있다. 그것은 중요한 고대 사본에 (본문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잘 맞는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모세의 율법 다시 말해서 당신이 믿는 구야성경에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간음 중에 잡힌 죄인을 돌로 치라고 했다면 치면 될 것이지 왜 예수님께 그 여인을 붙잡아 데리고 왔는가? 왜 예수께 어떻게 할지를 물었는가? 몰라서가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다. 알려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고소할 틈을 얻기 위한 시험이었다.
어떤 시험인가?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잘 아신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구약성경대로 돌로 쳐 죽여라고 한다면 두 가지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첫째는 사랑을 부르짖는 예수가 실상은 잔인하다. 무자비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둘째는 유대인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그러니 돌로 치라고 했다면 로마의 법을 어기는 죄인이 되고 마니 고소당할 수 있었다.
또 만일 돌로 치지 말라고 하셨다면 율법을 어긴 것이 된다. 유대의 법을 어긴 죄인이 되고 만다. 그러니 고소당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돌로 쳐다 해도 죄인이 되고 치지 말라고 해도 죄인이 된다. 그러므로 저들의 질문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잔악한 시험이었다.
그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 즉시 대답을 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땅에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시었다. 궁지에 몰리셨다고 생각했다. 저들은 예수님이 그래 의기양양해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손에 손에 돌을 들어 보이며 아니 왜 대답을 못하는거요? yes냐 no냐. 시간만 끌지 말고 빨리 대답하라. 도대체 당신은 어느 쪽인가? 7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한참 침묵하시며 땅에 글만 쓰시던 예수님! 벌떡 일어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다. 그 말씀을 들은 저들! 어찌 되었나?
9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아무도 그 여자를 정죄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다.
그러면 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우리는 죄인을 어떻게 보고 대해야 하는가?
저는 이 땅에 공의 실현을 위해서는 사형제도가 옳고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 죄인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무죄한 희생자들의 생명이 고귀하기 때문이다. 성경말씀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사형폐지론이 공존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엊그제 오크라호마 주청사 폭파범 티모시 맥베이가 약물 주사로 죽었다. 그는 주청사를 전쟁으로 폭격 맞은 것처럼 흉물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폭파 테러범이다. 1000년 범죄사에 잔악한 20명 중에 하나다. 그는 또 죽을 때도 뉘우침이나 후회하는 빛이 전혀 없었다. 168명이 희생됐다.
그런데 그를 사형시키지 말라. 사형반대자들이 모여 데모를 했다. 왠가? 사람을 사형시키는 것은 잔인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누구누구를 정죄하고 죽일 수가 있어. 저는 죄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형제도는 내게 잘못한 사람을 잡아 죽이고 복수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백성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 법을 세우고 집행하는 일이다.
이제 본문을 보자.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성경을 전문적으로 베끼고 가르쳤다. 게다가 혹시라도 성경대로 살지 못할까? 음욕이라도 품게 되면 어찌 할까? 그래 여자를 안 보려고 눈을 가리고 다니다가 말뚝이나 벽에 부딪쳐 이마가 깨지고 피를 흘린 사람들이다.
그러니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자신들과 비교하면서 이 더러운 죄인 할 말했다. 그래 나는 의인이야, 저 여자와는 신앙이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달라. 저 여자같은 죄인은 정죄되고 돌에 맞아 죽어야 싸! 나는 달라. 그러나 정말 그랬는가?
여러분! 내가 그렇게 믿었던 자식이 담배를 피운다. 아니 친구들과 어울려 마약도 한단다. 어떻게 하시나? 여러분의 반응이 무엇인가? 놀란다. 기가 막힌다. 욕한다. 때린다. 이 나쁜 놈! 그러나 나는 어떤가? 왜 내 아이가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하는가? 부모를 골탕 먹이려고 괜히 그러는가?  
서울의 도심 한 복판에서 고등학생이 술에 취해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서 그 자리에서 4명이 즉사했다. 그 중에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 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 영안실에서 딸의 시신을 확인했으나 도저히 딸이 죽었다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딸에게 술을 판 놈을 죽여 없애고 말겠다. 분을 사기지 못한 채 찬장 문을 열고 평소 감춰 두었든 술병을 꺼내든다. 그런데 거기에 적은 쪽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빠! 아빠가 사랑하는 딸이 많은 술병 중에서 한 병 가져 간다고 해서 화를 내시지는 않겠지요? 그 쪽지를 본 아버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술병을 모두 꺼내 술을 하수구에 쏟아 버리며 내 딸은 내가 죽였어 라며 통곡을 했다.
이제 본문을 보자. 나는 의로우니까 죄가 없으니까, 더러운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여야 가정이, 우리 사회가 깨끗해져! 예수여 나는 돌로 칠만 하지 않소? yes 하시오 빨리요. 침묵하시고 땅에 글만 쓰시던 예수님! 일어섰다. 입을 여셨다. 당신들 중에 죄 없는 가가 먼저 돌로 치시요!
그리고 어찌 되었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다 나가고.... 누구부터요, 어른부터 말귀를 빨리 알아듣는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들었던 돌, 던지려던 돌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얼굴을 가리고 그 자리를 빠져 나갔다. 왜요? 예수님 말씀에 부딪치니 양심의 가책을 받고 부끄럽게 되어...
어느 학자가 그래요. 예수가 허리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저들의 죄를 하나씩 기록하셨다고... 그걸 읽다보니 사실이었다. 그런 끔찍한 죄들이 내게 있었어요. 마음을 뚫어보시는 예수님(그래 양심의 가책을 받고 돌을 떨어뜨리고 나도 죄인이구나, 나도 죄인이야!)
창세기 38장에 유다가 결혼을 해서 엘과 오난이라는 두 아들을 낳고 또다시 셀라란 셋째 아들을 낳았다. 장자 엘은 다말이란 여자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자식이 없이 엘이 죽었다. 당시 관례대로 둘째 아들 오난을 다말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도 자식없이 죽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막내 아들 셀라가 클때까지 기다리라 내가 그도 네 남편으로 주겠다. 그런데 장성했어도 시아버지가 약속을 안 지킨다. 기다리다 지친 며느리 다말이 과부의 옷을 벗고 얼굴을 가리고 창녀처럼 꾸며 길거리에 서 있으니 유다가 창녀로 알고 흥정해 왔다. 내가 염소새끼를 주리라. 그때 다말이 약조물을 요구했다. 그는 약속물로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주었다. 어느덧 3개월이 흘렀다. 그런데 유다에게 들려오는 소문이다. 당신의 며느리 과부 다말이 행음을 해서 잉태했다. 유다가 무어라 했는가? 믿었던 며느리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행음해? 그를 당장 끌어내어 불태워라! 못된 며느리 같은 이. 더러운 며느리, 우리같이 깨끗한 가문에 창녀같은 며느리는 필요없어! 동네 창피해서! 끌어내! 불태워 죽여!
그때 다말이 무엇이라 했는가? 시아버지 유다에게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이 물건 주인이 누군지 알아보고 저를 불태워 죽이세요. 유다가 어찌 했나? 그가 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알아보고 너는 나보다 옳도다. 불태워 죽일 죄인이 아니었다. 양심에 가책을 받고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죄인이었다.
여러분! 내 이웃 중에 형제나 자매 중에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같은 사람이 있나? 내게 손해를 입히고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오래 전에 문제가 있던 사람이 우리 교회를 찾아 왔는가? 수군수군할 것인가? 욕할 것인가? 비난할 것인가? 정죄할 것인가? 그 사람은 조심해야 돼, 우리 교회에 나오면 안돼 할 것인가? 그게 무엇인가? 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도 용납하고 사랑하고 형제로 대할 수 없다면 적어도 바리새인, 서기관은 되어야 한다. 왜요? 예수님! 너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천국에 갈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 저들처럼 예수님! 어떻게 할까요? 돌을 던질까요, 정죄할까요, 물어는 봐야 한다.
여러분, 예수님은 무어라고 하실까요? 예수님 말씀이 없으신가? 그러면 아마도 예수님은 허리를 굽히시고 내 마음의 죄를 하나씩 찾아가시며 써내려 가시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돌을 던질까요 하고 묻기 전에 먼저 내 영안의 눈을 뜨고 내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옳다. 예수님이 지적하실만한 죄를 찾아 보아야 한다.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통촉하시는 하나님! 어디나 계시고 어디서나 나를 지켜 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아야 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신 예수님(마 5:28)! 그 주님 앞에서 내 마음의 음란한 생각을 간음으로, 시기와 미움은 살인으로, 남의 것을 탐내는 욕심은 도적질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누구에게 들었던 돌을 내려놓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간음한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미워하던 사람, 시기하던 사람, 정죄하던 사람, 다시는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괴롭게 하면 성나게 하면 죄짓는 것을 보면 또다시 돌을 들고 싶다. 그래 잘 안 된다. 사람이 32세가 넘으면 신앙으로도 말씀 공부로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그렇다.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어찌해야 하나?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거기서 끝나시지 않았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죄인을 용서하셨고 사랑하셨다. 그러나 죄는 모른체하지 않으셨다. 또다시 간음하지 말라, 전처럼 살지 말라. 돌아서라, 방향을 바꿔라. 회개하라. 그렇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정죄하던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 정죄하고 돌을 던지는 잘못된 습관에서 돌아서야 한다. 우리의 힘이나 의지로 안 된다. 기도해야 한다. 돌을 들으려고 할 때마다 너는 죄가 없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요? 가시밭 같은 마음, 돌짝밭같은 마음, 길바닥같은 마음을 성령님의 역사로 갈아엎고 옥토의 마음의 밭되어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이 항상 살아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이 내 생각과 의지를 다스리게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다 비난하고 정죄하고 돌을 들고 치려 달려드는 사람까지 죄는 밉지만 그 사람은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 것으로 안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때 우리는 주님이 바라시는 예수님의 사람 크리스찬이 될 수 있다. 주님뜻대로 참으로 믿음의 형제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믿지 않는 영혼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1873년 벨기에 캐토릭 신부 조셉 다미안은 몰로카이섬에 있는 하와이 문둥이들을 전도하기 위해 파송되었다. 그는 문둥이들과 친분과 우정을 쌓으며 그 영혼을 구원할 큰 기대를 가지고 섬에 도착한다. 우선 예배당을 지었고 예배를 시작했다. 그는 문둥이들에게 그의 마음을 쏟아 전도했다. 그러나 전도는 실패처럼 보였다. 아무도 그의 전도에 반응하지 않았다. 12년을 고전한 다미엔은 마침내 그 섬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부두에서 손을 비벼가면서 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을 바라보니 이상한 흰 반점들이 보였다. 약간의 마비도 왔다. 문둥병이 든 것이다. 다미엔은 다시 문둥이 촌으로 돌아갔다. 다미엔이 그들과 같은 문둥병자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문둥이들이 예배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 영혼사랑으로 문둥이들에게 예수를 전하러 간 다미엔!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었다. 문둥이가 되는 희생을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을 때 그들은 복음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사랑! 오늘 우리도 이런 사랑으로 나가 전도해야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 사랑만이 불신자의 마음을 연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사랑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다.
누가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가? 세상에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모두 상처받은 사람, 돌에 맞은 사람,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다. 저들은 교회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로 우리 교회를 찾아온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맞을 것인가? 본문에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바리새인, 서기관이 될 것인가? 경계할 것인가? 나는 당신과는 달라 할 것인가? 신앙생활에 미숙하다고 look down 할 것인가? 안 믿은 이의 습관이 나타날 때, 얼굴을 찌푸릴 것인가? 나와 상관이 없는 낮선 사람 취급할 것인가?
우리 교회는 모든 사람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상처받고 우리교회를 찾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상처를 싸매주고 치료해서 낫게 하는 사랑의 의사가 되어야 한다. 새 생명은 사랑으로 탄생되며 사람의 돌봄으로만 자란다. 이 일은 내가 상처받은 상태로는 안 된다. 먼저 우리 교회안에서 서로 돌아보아 용서하고 위로하고 섬겨야 한다. 교회안에 모든 성도가 서로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만나면 사랑을 나누고 세상의 상처가 아물고 자꾸 교회에 나오고 싶고 그때 우리는 우리 교회를 사랑의 병원으로 만들어 갈수 있다. 거기서 내가 사랑의 의사가 되어지면 새 생명은 사랑으로 탄생되며 사랑의 돌봄으로 자란다.  
여러분! 우리 교회 사랑의 병원 만들고 우리 모두가 사랑의 의사가 된다면 우리교회는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세상에서 상처 입은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모여들게 될 것이다. 여러분을 통해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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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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