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 | 목회 칼럼 | 신학상식 |성경개론(O.T) | 성경개론(N.T) | 속독성경 | 자유게시판 | 영혼의 쉼터 | 매일아침큐티 | 교회와이단 | 관리자


교회와 이

 

 

 

 



  제목 : 세족의 의의
  본문 : 요 13:1-17
RevSuh  2017-05-12 10:51:05, 조회 : 975, 추천 : 105
설교동영상보기 ☞   목록에서 icon을 직접 클릭하셔도 됩니다.



세족의 의의(요 13:1-17)(102101)

이런 유머가 있다. 오래전에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이웃에 살았다. 일본 사람이 중국 사람을 보니 세수도 잘 안 하고 목욕도 전혀 안 하고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일본 사람이 중국 사람을 만나 우리는 매일 세수를 하고 자주 목욕도 하는데 왜 당신들은 얼굴도 안 씻고 목욕도 하지 않소? 그랬더니 중국인이 하는 말이 당신들은 얼마나 더럽길래 매일 세수를 하오? 라고 응수했단다.
오늘 본문도 물로 씻는 예기다. 유월절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 때 예수님께서 친히 허리에 수건을 동여매시고 대야에 물을 퍼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고 40-70일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물을 마시지 않고는 못 산다. 그런데 물은 이렇게 생존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알러지로 수년씩 고생하신 분들의 고충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단다. 눈물 콧물로 크리넥스를 대고 산다. 또 알러지약 기운에 지친다. 그래도 안 낫는다. 그런데 용하다는 중국 한의사에게 가서 침 세 번 맞으니 알러지가 끝났다. 알러지에서 해방! 참으로 신기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단다. 감기에 걸리면 다시 도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누가 감기를 어찌 막겠나? 그러나 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은 있다. 밖에서 활동하다 집에 들어와서 반드시 물로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이다. 감기가 만병의 근원이라면 물은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그 많은 병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이렇게 보면 물만큼 귀한 것은 없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물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늘나라에 간다. 요한복음 4장 10절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생수를 말씀하셨고 또 7장 8절에는 초막절 마지막 날 생명수의 강물을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로마 군인들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물이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 오늘 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세족행위는 어떤 의의가 있는가? 우리는 이 사건에서 무엇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가?
예루살렘 마가요한의 다락방에는 유월절 식사가 다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손발을 닦고야 식사를 하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제자들은 서로 변론을 그치질 않았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크냐? 너보다 내가 크다며 서로 자만심에 부풀어 있었다. 큰 자는 섬김을 받아야 하니 거기 누구도 발을 씻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때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동여매시고는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기를 시작하셨다. 제자들은 얼떨결에 되어진 일이지만 당연하듯이 그냥 발을 예수님께 내 맡기고 있었다. 아 시원하다. 이런 때도 있구나! 제자도 할 만하구나 라고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베드로의 차례가 왔다. 베드로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못 배웠고 예절을 모른다고해도 어찌 스승이 제자의 발을 닦아 주신다는 말인가? 자기가 선뜻 나서서 주님,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는 못했을망정 주님! 닦으십시오 하고 발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8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님! 완강하게 반발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 제자들의 발을 닦으신 예수님의 세족행위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어떤 상징적인 뜻이 있었나?
1절을 보면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그러면 예수님 자기 사람으로 아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누가 크냐고 세상 영광만 바라는 자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자들! 제자이면서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 내일 아침에는 그를 부인할 자들, 그 밤에 모두 그를 버릴 자들! 그리고 모두 도망칠 자들이었다. 그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세상떠날때까지 그리고 생명을 다한 사랑! 그러니까 세족의 행위 뒤에는 예수님께서 죽으실 십자가가 놓여 있었다. 따라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깨끗게 해 주신 예수님의 세족의 의미는 식사하기 전에 손발을 닦는 것과 같은 위생적인 습관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다.
더러워진 제자들의 발을 친히 물로 닦아 깨끗하게 해 주신 것은 우리의 더러워진 마음과 생각 그리고 행동의 죄를 씻어 정결케 해 주실 십자가의 보혈! 그러니까 그 보혈로 인해 죄사함과 용서의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면서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그리고 거기서 흘리실 보혈로 제자들의 죄가 씻겨져 정결케 되고, 구원받게 될 것을 내다보셨다. 그래 기쁘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제자들의 발이 더러웠던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죄로 더러워진 상태다. 제자들의 발이 물로 씻겨져 깨끗해져야 했듯이,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하고 깨끗하게 씻겨져야 한다. 그것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보혈로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세족의 행위에서 제자들이 이 진리를 깨닫고 알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세족을 거부한 베드로에게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 세족의 의미가 식사하기 위한 준비나, 위생적인 관습뿐이었다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발을 안 닦는다고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실 리가 없었다. 세족은 십자가의 죄용서와 연관이 있었다. 그러니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는다면 너는 내 십자가의 보혈과 죄용서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과잉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제 손과 머리까지 빨아주세요.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 10절을 보면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온 몸은 깨끗하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벌써 목욕을 해서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 목욕한 자란 말도 주의가 필요하다. 여기서 목욕은 자기 스스로 목욕했단 말이 아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목욕시켜 주듯이 목욕시킴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그래서 깨끗하게 된 자를 가리킨다.
무슨 말씀인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님으로 거듭난 것을 가리켜 주신다. 성령님의 역사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를 내 구주로 믿는 자는 거듭난다. 목욕한 자가 된다. 온 몸이 깨끗해졌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다. 믿음으로 의로워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발은 씻어야 한다. 무슨 말인가? 날마다 사는 삶, 발을 디디고 세상에 살면서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한 삶을 가리킨다. 사업을 하면서 정직하지 못했다. 불쌍한 이웃을 보고도 못본체하고 돕지 않았다. 내 눈속에 들보를 가지고서 형제의 눈에 티를 빼라고 비판했다.
어느 분이 그런 글을 썼다. 남편과 아내는 평생을 평행선을 달려간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보호아래 가두어 두려고 하고 아내는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서 자유하려고 한다. 그런 것 같다. 거기서 생기는 긴장과 갈등, 그래 마찰이 생긴다. 아내는 남편을 미워하고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녀가 되어 부모님 섬기지 못했다. 직분받고 책임감 느끼며 충성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워 살았다. 오래 전에는 수요예배는 주일학생까지 나오는 것이 당연했는데, 신앙생활이 너무 안일하고 게으르고 형식적이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실패한 베드로처럼 멀찍이에서 따른다. 예수를 믿고 중생했다. 온 몸이 깨끗하다. 그러나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발이 더러워졌다. 목욕을 다시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발은 씻어야 한다. 어떻게요? 물로 씻어야 한다. 어떤 물인가? 수돗물로, 비눗물로 씻겨지지 않는다. 주님의 보혈로, 따라서 발에 뭍은 더러운 죄는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씻겨지기 위해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하나님! 두루두루 잘못했습니다. 다 앉아서 용서해 주세요가 아니다. 그건 발을 물에 담그지도 않고 씻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닦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같은 죄 쉽게 짓지 않을 수 있다.
여러분! 베드로를 보라. 세족식이 있었던 바로 그날 밤 지나고 이른 새벽에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 발을 씻고나서 몇 시간 후에 또 그 발 더러워졌다. 체포가 두렵고 재판과 고문이 죽음이 두려웠던 베드로는 적은 계집종에게 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그리고나서 어찌 했나? 누가복음 22장62절에 대제사장의 뜰에서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 회개의 눈물로 베드로는 더러워진 발을 깨끗하게 닦았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이다.
250여년이나 박해를 받았던 초대교회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를 공인했고 자유를 얻게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황제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많은 신자들이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죄를 다시 짓는 것을 죽기만큼이나 싫었을 것이다. 귀하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목욕한 자도 중생하고 거듭난 신자도 죄를 지울 수 있다. 발이 더러워질 수 있다. 그러나 씻으면 된다. 회개의 눈물로 씻으면 정결케 해 주신다. 마음에 걸리는 죄가 있나? 담고 살지 말라. 주님 앞에 내어 놓으라. 베드로처럼 울며 회개하라. 거리끼는 모든 죄에서 정결케 되시기 바란다.
그러면 예수님의 세족의 의의는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 받는데만 있는가? 죄인이 의롭게 되고 정결케 되는 것이 전부인가? 아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12절을 보면 저희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
13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 함께 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한 형제요 가족이다. 함께 교회를 섬긴다. 그런데 서로 알게 모르게 말로 행동으로 오해한다. 시기도 한다. 경쟁도 한다. 발에 때가 묻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서로 죄를, 실수를 고백하며 눈물로 회개하며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한다. 그래 정결케 서로 씻어 주어야 한다. 형제가 된 우리는 서로 깊이 이해하며 사랑하며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겸손히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사람들로 우리의 선한 행실의 신앙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야 한다.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배고픈 형제를 보고 밥을 먹어 배부르게 하라. 헐벗은 형제에게 옷을 입어 따뜻하게 하라. 병든 형제에게 약을 사서 먹고 건강해져라. 그러나 밥 안 주고 옷 안 주고, 약을 사 주지 않는다면 세족의 진리를 깨달은 섬김의 삶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의 발을 닦아 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발이 더러우니 깨끗이 닦으라고 말만 하시지 않고 친히 더러운 발을 닦아 주셨다.
노구찌 히데요라는 독사의 혈청요법을 발명한 세계적인 의학자가 있다. 그 분은 그 요법을 발명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연구했다. 독사에게 물려 한 쪽 손을 잃어 버렸다. 연구 중에 약품의 폭발로, 그의 얼굴을 보는 사람마다 으악 소리를 지를 정도로 흉하게 됐다. 그러나 그의 이런 희생으로 독사에게 물린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섬김이나 은사는 머리나 입안에서만 맴돌아서는 안 된다. 내가 죽고 내가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말 바로 섬기려면 제자들을 섬기기 위해 스승의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밑으로 떨어지신 예수님을 본받고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한 것은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다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서 세족의 의미가 십자가의 보혈, 사죄, 구원의 의의가 있다면 제일 중요한 세족의 섬김이 무엇이겠나? 십자가의 복음으로 죄인이 용서받고 구원받게 하는 섬김보다 더 중요한 섬김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불신자의 영혼사랑! 영혼구원을 위해 종처럼 발을 닦는 겸손과 섬김이 있어야 한다.
전도를 해 보라. 발을 닦는 일이다. 부끄럽다. 무시당한다. 너나 잘 믿으라며 조롱받는다. 필요없다고 한다. 세월 좋아 전도나 하고 다닌다고 빈정댄다. 자존심 상한다.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 설교 CD을 가게마다 놓아두기 위해 음식점에 가면 밥 사먹고, 화장품 가게에 들어가면 화장품을 사면서 얼굴을 땅에 닿게 절한다. 기분이 상해도 웃어야 한다. 친절해야 한다. 종이 안 되면 못한다. 그래도 전도하는 것은 주님은 그 영혼구원을 위해 죽으셨고 발을 닦아주셨으니 우리도 해야 한다. 전도만큼 중요한 섬김과 봉사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본 보이신 일이니 주님 앞에 설 때 복이 있을 것이다. 전도대원 여러분 힘내세요. 전도는 남의 더러운 발을 닦는 것이다.
오늘 세족의 의의를 밝히 깨닫게 해 주신 예수님. 너희도 발을 닦으라 명령하셨으니 이 자리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여러분, 힘들지만 제일 중요한 섬김의 주님을 본받는 전도에 동참자가 되시기 바란다.
중국의 도시에서 설교한 미국 선교사, Henry 포펜 박사, 교회에 잘 나오고 성경공부도 열심인 중국인들! 그러나 도무지 말씀대로 살지 않는 그들에 대해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에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에 가서 전도해 보기로 했다.
시골 사람들을 모아놓고 예수님 사랑, 섬김을 설교하니 관심을 가지고 기쁘게 듣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미소로 응답하는 사람,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머리가 하얗게 센 마을 영감님이 아까부터 뭔가 알고 있다는 듯이 선교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기쁘게 듣고 있다.
설교가 끝나자 그들 중에 나이 많으신 영감님이 우리는 그 사람을 알고 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예수님이 여기서 사셨었다고 한다.  포펜 박사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설교에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 분 예수님은 1806년 전 여기서 수천 마일 떨어진 유대 나라에서 사셨고 죽으셨습니다.
주름이 많으신 영감님! 그렇지 않아요. 그 분은 바로 여기서 사시고 죽으셨소! 그리고는 손을 들어 저 아래 바퀴자국이 난 길을 가리키며 따라 오란다. 포펜 박사는 마지못해 터벅터벅 영감님의 뒤를 따라갔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무덤에는 한 의료 선교사의 이름이 묘비에 새겨져 있었다.
그 의료 선교사는 외딴 마을에서 동료 선교사에게 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채 진실한 신자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갔다.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바로 예수였다고 할 정도였다.
여러분, 예수님의 세족의 의의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 의사 선교사처럼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본받아 평생을 발을 닦는 섬김과 사랑의 삶을 사는 데 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이해와 용서의 사랑으로 형제의 발을 닦자. 그리고 불신자에게 세족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따라 발을 닦는 전도로 그 영혼구원하시고 주님 앞에 서시기를 바란다. 세족의 진리를 알고 행하시므로 주님이 약속하신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한다.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Amen

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Best view at 1280x1024 ◇ 2008ⓒ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