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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이

 

 

 

 



  제목 : 서로 사랑하라
  본문 : 요일 3:10-24
RevSuh  2008-10-09 20:54:41, 조회 : 2,892, 추천 : 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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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요일 3:10-24)

과거에 우리는 영적으로 모두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자녀였던 것은 첫 범죄자 마귀처럼, 우리도 죄를 짓고 용서받지 못하므로 범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범죄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힘쓸 또 다른 특성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도중에 가장 오래 산 이, 순교하지 않고 장수한 이는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요한입니다. 그는 늙어서 거동이 불편할 때 신자들이 모인 곳에 모셔 오면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명령을 상기시켰다고 해요. 내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 저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신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축복을 주십니까?
왜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는 가인같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12절입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가인이 누구입니까? 아담과 이브의 첫 아들입니다. 그 이름은 얻었다는 뜻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용서를 비는 대신 서로 남의 탓으로 돌리며 나는 잘못이 없다고 결백을 주장하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은 땀 흘려 일해야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이브는 해산의 고통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심판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시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첫 그들을 닮은 사람을 보고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 첫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는 얻었다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아벨이란 둘째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 가인이 둘째 아들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최초의 살인사건이 아담의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장자와 차자의 형제간에 장자가 차자를 죽였어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다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다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자 가인은 너 때문에 내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면 시기하여 그의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있읍니까? 하나님 신앙, 그 하나님께 함께 예배하면서 서로 시기해서 미워하며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예배드리지만 악한 자에게 속하여 같은 예배자인 믿는 형제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그런 일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사실입니다. 지금도 그런 형제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한 교회에서 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다른 형제에게 당신이 잘못이야, 당신은 안돼 하며 미워하고 살인합니다. 형제가 아니고 원수입니다. 왜요? 악한 자에게 속했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다가 교회까지 나가서 싸운다. 세상법정에 가서 싸운다. 세상법 가지고도 안 됩니다. 서로 내가 진짜 예배자라고 주장하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한다. 서로 내가 옳고 너는 잘못됐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편도 아니시다. 서로 성내고 분해하고 미워하고 싸웁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보실 때 벌써 살인이다. 그런데 그것은 dr한 자에게 속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자식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가인같은 살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이유가 또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고 닮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 명령, 그 계명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께 속하고, 사랑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고 사랑할 때 하나님 앞에, 다시 오시는 주님앞에 담대히 설수 있게 됩니다.

사랑이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요 표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까? 물론 교회가 평화롭고 은혜스러울때는 모든 신자가 다 사랑의 사도같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면 내 속에 숨어 있던 참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내 겉모습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당하실 수난을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어찌했습니까? 아니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안됩니다. 그러나 고난이 기정사실이 되자 어찌했습니까? 그때 무어라 했습니까?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린대도 다른 제자들이 다 주를 버리고 도망친다 해도 나는 주님과 함께 죽을 것입니다 라고 하지 않았읍니까? 그의 결연한 자세의 외모와 장담한 말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참 주님의 제자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생명걸고 예수를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오늘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닭이 울기 전에 그것도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 자신만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오자, 폭도들이 예수를 잡으러 오니 그를 체포하니 모두 날 살려라 도망을 쳤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한 말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뜰에서 심판당하실 때에 멀찍이에서 바라보다가 적은 계집종 앞에서도 두려워 난 예수를 모른다고 하였고 심지어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교회가 풍랑에 휩싸이면 천사같고 사랑의 사도같던 성도가 분으로 시기로 투기로 미움으로 살기로 차게 될 수 있습니다. 싸우는 교회들을 보세요. 서로가 그래도 누가 그럴 줄은 몰랐다. 그런 사람인줄 몰랐다고 합니다. 싸우는 곳에는 사탄이 역사합니다. 미움이 삽시간에 양편의 신자들의 마음을 주장합니다. 교회가 사랑의 천국이 되지 못하고 미움의 지옥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투고 싸우는 곳은 그 곳이 심지어 교회라도 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어느 편의 악한 자에게 속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해야 하나? 우리가 실천해야할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희생의 사랑을 해야 한다.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신자는 누구나 내가 사랑하는 자이어야 함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사도요한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정말 사랑, 사랑, 사랑합니다. 이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의 사랑을 속빈 감정 같아서는 안 됩니다. 18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예수님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랑의 희생입니다.
어떻게 가능한가요? 예수님을 보세요. 권리포기입니다.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늘 영광도 포기하셨고 섬김을 받기도 포기하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섬기시고 생명을 많은 죄인들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는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바쁘시었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천국복음을 군중에게 전하셨습니다.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마침내는 당신의 생명까지 다 내어 주셨습니다.

죄인된 우리가 정죄되고 심판받은 것을 내다보시며 안됐구나 불쌍하다고 동정만 하신 것이 아니시고 대신 죄값을 당하시었고 희생하시고 마침내 뛰어드시어 죄인의 운명에 행동하셨습니다.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주시고 주시고 주셔서 남은 것이 없을 때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계산적인 사랑이 아닙니라 되돌려 줄 수 없는 사랑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고 판단되는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내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나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런 사랑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벨기에의 캐토릭 신부 조셉 드뷔스터는 몰로타이섬 나환자들을 섬기며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나환자들은 건강한 다이앙의 복음을 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처럼 자기 몸에 나병이 생기기를 소원했습니다. 1884년 그가 그 섬에 들어온지 11년째였는데 마침내 그는 그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때 그는 나환자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 전도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행여 나병이 나으면 어쩌나 걱정까지 했습니다. 그는 그의 소속관구 주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이제야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내 희망의 빛이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뵙는 일은 생각할 수 없을지 모르나 저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그는 몰로카이섬 생활 16년만인 1889년 4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 주신 우리가 해야 할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나는 어떻습니까? 사랑합니까? 말과 혀로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려고 애쓰십니까? 희생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남의 유익을 구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에 내 바람을 굴복시키십니까? 사단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면 내가 받은 이 사랑을 나도 실천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를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한국이 해마다 태풍이나 장마로 피해를 보면 그때마다 우리는 구제헌금을 해서 본국 수재민을 돕곤 했습니다. 금년에도 예외는 아니었고 한인회 등, 몇 단체들이 한국의 수재민 돕기에 참여한 것 같습니다. 예년같으면 우리 교회도 예외없이 구제헌금을 해서 보냈고 교회협의회를 비롯해서 대형교회들이 앞을 다퉈 한국 수재민을 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KBS 미주지사에서 매일 저녁마다 방송을 통해 호소하지만 동참자는 거의 없는 듯 싶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국에 보다 북한에 더 관심이 많은 한국정부가 굶주리고 가난하게 사는 국민들보다 북한에 돈을 보내고 구호품 보내기에 더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사일 문제로 남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냉각된 관계가 되자 한국 정부가 북한 돕기에만 열을 올리지 않고 남한의 수재민 돕기에 나설 것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는 남한의 수재민 돕기보다는 북한돕기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 같습니다.

어느 분이 신문에 북한을 돕지 말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 분의 논리가 그렇습니다. 한국정부가 누구를 먼저 도와야 하는가? 그 말은 옳아요. 오늘 본문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나 자원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사랑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에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순서가 있다는 말입니다. 14절, 16절, 17절이 다 그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재물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모두 형제입니다. 형제만 사랑하란 말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모두 형제가 아닙니까? 그러니 사랑해야 합니다.

그 형제 사랑을 못한다면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는 서로 돌아볼 의무와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형제간에 서로 우애하고 사랑하는 것을 보는 것은 부모의 기쁨이 아닙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17절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형제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은 형제의 궁핍이나 어려움을 어려움 중에 있는 형제가 알려서 알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형제된 신자간에는 서로의 형편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렵다고 다른 형제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게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경우에 여유가 있는 형제는 어찌 해야 합니까? 빌려 달랜다고 언제 갚겠다는 말 때문에 돈을 빌려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형제간에 행할 사랑이 아닙니다. 성도간에 돈을 꾸고 갚는 돈거래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없으면 no해야 하고 있으면 거저 주어야 합니다. 되돌려 받기를 기대하면 그 형제가 아니라 돈이 거짓말을 합니다. 신뢰에 금이 갑니다. 여유가 있으면 거저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형제사랑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형제의 관계는 가깝고도 먼 관계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가깝지만 한껏 서로를 존경하며 예의를 지켜야 하는 관계입니다. 성도의 관계는 존경과 예의로 다져집니다. 지속되고 깊어집니다. 그 관계가 깨지면 신앙에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의심과 불신의 관계가 되면 결코 존경이나 사랑은 불가능해지고 맙니다. 형제사랑은 신자간 사랑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육신의 형제사랑도 사랑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8에서 바울은 친구를 돌아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국가의 제도나 사회의 자선단체가 가난한 자와 과부를 돌보지 못했을 때 사회가 저들을 도왔는데 신자 중에 친척의 과부가 있다면 그를 반드시 도와 사회로 짐을 지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찌 하십니까? 내가 도와야 할 친척은 없습니까? 나는 돕고 있습니까? 돕지 않으면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면 어떤 복을 주시나?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21절,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22절).

형제사랑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 관대하십니다. 은혜구원 받고,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축복을 더하십니다. 우리가 자녀들이 말을 잘 들을 때 그것이 당연하지만 상을 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에게 가장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다고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여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서 구하는 것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앞에 나오는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살며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기도는 응답받습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정말 큰 축복입니다. 소원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족함이 없는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런데 신자는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 모든 좋은 것을 주시고 주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 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응답을 받았습니까? 아니라면 오늘 본문의 원인은 아닌가? 사랑하지 않았고 응답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사랑의 하나님께 미움을 품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십니까? 형제 중에 사랑 못할 이가 있었습니까? 사랑하세요. 용서하지 못할 이 있읍니까? 용서하십시다. 큰 사랑보다 대접의 사랑 구역마다 구역장이 힘들 것은 구역예배 드릴 가정이 나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접사랑 실천부터 합시다. 그것이 기도의 응답하는 길입니다. 형제 중에 친척 중에 구원받지 못한 이가 있습니까? 그 영혼구원으로 사랑하고 기도합시다. 친척중에 내 도움이 필요한 이가 있는데 눈감은 이가 있습니까? 찾아가 돕고 위하여 기도합시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이니 원수도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하여 행함과 진실된 사랑을 합시다. 하나님의 약속을 구하는 것을 받아 누리는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아갑시다.

말씀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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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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