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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이

 

 

 

 



  제목 : 회복의 은혜
  본문 : 삼상 6:10-16
RevSuh  2012-10-09 20:59:21, 조회 : 2,688, 추천 : 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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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은혜(삼상 6:10-11)

9.11 테러 1주년이 되었다. 상상도 못했고, 할 수도 없었던 테러범죄로 삽시간에 4,000명 이상이 생명을 잃었다. 미국은 테러 1주년을 맞으면서 추모행사와 더불어 테러 지원국에 대한 전쟁준비를 끝냈다. 그러나 테러를 당한 사람에 대한 보상금이나 추모행사 그리고 테러조직에 대한 공격이 희생자의 남은 가족에게 얼마나 위로와 치유가 되겠는가?
어느 한국 목사님은 테러로 아들을 잃었는데 그 보상금은 알지도 못하는 백인 여성이 가로채갔다. 얼굴도 모르고 알지도 못하는 여성이 나타나 자기가 당신의 며느리라고 주장했다. 아들을 잃고 보상금도 잃고 이중의 상실로 괴로워하고 있다.
어찌 테러뿐이겠나? 중병으로 건강을 잃고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가고 사업에 실패하고 직장 잃고 어렵스리 장만한 집도 잃어 아파트로 나 앉고 사랑하는 자녀를 잃고, 어찌 다 예를 들겠는가? 그런데 이런 상실의 고난에 부딪히면 낙심한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의심하며 불신의 늪에 빠진다. 상실의 고통은 믿음의 상실로 이어지며 기쁨의 상실이 되고 만다. 믿음이 없으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그 결과 기쁨없는 무력한 신앙생활이 되고 만다.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레셋과의 싸움에서 많은 군인들이 생명을 잃었다. 두 제사장을 잃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다. 대제사장 엘리도 죽었다. 상실이요 상실이요 또 상실이었다. 낙심한 저들은 신앙 대신 의심이, 기쁨 대신 슬픔에 지배되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잃었던 법궤를 다시 찾아 믿음을 회복하며 다시 기쁨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나? 우리가 환란으로 인해 믿음을 상실할 때 어떻게 다시 회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가?
1. 회복의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전쟁에 패하고 지도자를 잃고 믿었던 법궤를 잃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상실로 좌절과 슬픔,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를 7개월이 흘렀다. 그들은 잃은 것을 되찾을 엄두도 못했다.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의 시신을 거둬 장사지내고 죽은 두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죽음을 슬퍼하며 새 믿음의 지도자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 전부였다. 제사장이 모두 한꺼번에 생명을 잃었으니 하나님께 제사도 드릴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믿었던 법궤를 잃고 말았으니까 불완전한 신앙마저도 회의로 변해가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언제 또 불레셋이 공격해 올지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을 것이다. 그 초조하고 불안한 7개월의 세월! 회복의 기대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다시 소망이 없었다. 불레셋과 다시 싸워 승리하고 법궤를 찾아올지 불가능하다. 한편 승리의 축제로 들떠 기뻐했던 불레셋은 어떠했는가? 승리를 자축하며 다곤신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상신으로 끌어내리고 그 사람이 만든 우상보다도 못하게 취급하는 불레셋 사람들에게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며 세상을 다스리시며 전쟁도 승리케 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을 우상보다도 무능한 신으로 모욕한 저들을 심판하기 시작하셨다. 다곤신을 치셨다. 그리고 법궤를 옮겨간 지방의 불레셋 사람들을 치시기 시작했다. 독종의 재앙으로 저들을 심판하셨다. 암이었는지, 임파선염증이었을지 혹은 쥐가 퍼뜨린다는 페스트였던지 그 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하나님께서 아스돗에서 치시니 법궤를 옮겨갔고 가드 사람들도 독종으로 치시니 에그론으로 옮겼다. 이스라엘을 쳐서 승리했다며 기뻐하던 저들은 기쁨이 사라지고 질병의 죽음으로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되었다. 승리는 했는데 망하게 되었다. 저들은 하나님이 치신다. 하나님은 강하신 신이시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 법궤를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빼앗은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불레셋을 치사 이스라엘은 잃었던 법궤를 되찾게 되었고 언약의 상실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고 기쁨을 되찾게 되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나?  법궤를 상실한 다음날부터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이스라엘은 엄두도 못내고 주저앉아 있는데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셔서 그 일을 끝내셨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수제자로 자부했던 베드로가 어떤 위기에 처해도 나는 결코 예수님을 안 버린다! 아니 다른 제자들이 다 버린다해도 나는 절대로 안 버린다고 장담했던 베드로! 그러나 로마 군인들과 성전 경찰들이 무장하고 횃불을 들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잡으로 오니 칼을 빼어 휘두르다가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실패자가 되어 갈릴리 호수로 되돌아가 다시 고기잡이가 되고 말았다. 베드로 아닌 시몬이 되고 사람낚는 어부가 아닌 고기잡는 어부로 전락해 버렸다. 믿었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패기와 용기와 열정은 사라지고 비겁함, 무기력과 낙심으로 믿음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제자가 된다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로 베드로를 찾아가시어 그의 신앙과 제사직, 사람을 구원하는 사명자로 회복시켜 주셨다. 회복은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떤가? 불레셋에 패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지가 약해진 이스라엘과 같은 상태에 있지는 않은가? 당당하고 자랑스러웠던 활력이 넘쳤던 지난날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에서 손놓고 세상 일에나 몰두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을 믿는다지만 사람보고 실망하고 스스로 시험받고 주저앉는 신앙이 되고 있지 않은가? 사업에 실패하고 낙심중에 있지는 않은가? 나는 다른 사람보다는 의롭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왜 현대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고생을 해야 하는가?  병낫기를 위해서 지금까지 울면서 기도해 왔는데 왜 하나님의 응답은 없는가? 그래서 신앙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신자도, 구원받은 성도도 이 세상에서 불신자와 다르지 않게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 면제되지 않는다는 사실밖에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불레셋의 전쟁에 패해 7개월의 세월이 흘렀고, 불레셋의 재차 공격이 두렵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긴 상태에서 회복은 엄두도 못내고 그런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지속하셨던 것처럼 그 하나님 살아계셔서 우리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하셨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살아계셔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 불행, 슬픔을 아시고 합력하여 선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다. 그 하나님을 믿으시고 그 신앙에서 흔들리지 마시기 바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무엇이 우리를 대적하겠나? 이 시간 회복의 기대와 소망으로 강하게 되시기 바란다.
2. 회복의 때까지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불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낼 때 그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 조언을 구했다. 저들은 법궤를 거저 돌려보내지 말고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저들은 하나님의 제사장도 선지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신에게 예배할 때는 빈손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적인 신앙이 있었다.
그러면 저들의 제물은 무엇이었나? 불레셋의 다섯 지방을 대표해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라고 했다. 여기서 저들은 생각하기를 아마 독종이라는 tumors가 혹시 쥐가 옮기지 않나 생각했다. 그래서 독종과 쥐를 금으로 만들어 신에게 바치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의 지방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을 속히 몰아내려고 했다. 그리고는 법궤를 싣고 갈 새수레를 만들어 멍에를 메 보지 않은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송아지는 떼어 집으로 보내고 그 소 둘로 수레에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 땅으로 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 두 암소가 송아지를 떼어놓았음에도 전에 멍에를 메고 일을 해 본 경험도 없고 수레를 끄는 훈련을 받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소를 몰지도 않았음에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리고 똑바로 벧세메스까지 법궤를 옮겨갔다. 무엇을 볼수 있나? 회복은 하나님의 역사로 은혜로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도 있다.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받은 신앙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 벧세메스로 법궤를 싣고 가는 암소 둘이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앞만 보고 갔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하게 이루시는 하나님!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회복의 은혜를 경험할 때까지 가야 한다. 두 암소가 송아지를 떼어놓고 울면서 갔다. 고난이 그렇게 우리를 슬프게 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길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보셨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때문입니까 부모의 죄때문입니까?
여기서 제자들은 소경된 고난 그 고난이 죄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맞는 생각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어떤 고난이나 죽음도 없었다. 죄는 고난의 결과다. 어떤 고난은 죄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인한 것이었다. 모세에게 범한 죄 때문에 미리암은 문둥병으로 치셨다(민 12:9-10).
그러나 고난이 항상 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큰 고난을, 적게 지은 자는 적은 고난이 오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의인보다 악인이 더 잘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고난당할 때 상실의 아픔을 겪을 때 무슨 죄때문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욥은 죄없이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잊지 말고 따라야 한다. 신자가 고난과 상실의 고통에서 하나님 나는 죄가 없는데 의로운데 왜 고난을 주십니까? 항변하고 떠나서는 안 된다. 왜요?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죄인이 아닌가? 하나님을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흔들리고 하나님과 멀어지면 회복의 은혜를 누릴 수 없게 된다. 욥처럼 고난당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 많던 재산 하루아침에 다 잃고 종들 다 죽고 열 자녀 다 잃었다. 온 몸에 악창이 났다.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서 기왓장으로 몸을 굵고 있다. 왕같던 욥이 거지같은 욥, 의로운 욥이 심판당한 죄인의 모습이 되었다. 오죽하면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떠났겠나? 게다가 세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 대신 정죄하니 견딜 수가 없다. 그는 친구들 앞에서 나는 의롭다. 죄인이 아니라며 항변하고 자신의 처지를 변호했다. 나중에 너무 힘드니까 자신의 난 날을 한하며 불평도 했다. 그러나 욥은 한 가지는 분명했다. 하나님을 대항하지는 않았다. 주신 자가 하나님이시니 가져가실 권리도 있으시다. 그는 하나님을 욕하거나 원망하거나 불신하고 떠나지 않았다. 그 극한 고난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좌우로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회복의 은혜를 받았는데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전에는 사람앞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의로웠다고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죄인으로 보게 되었다. 물론 직접적인 죄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재 가운데서 회개했다. 자기를 괴롭히던 친구들을 미워했지만 사랑으로 용서하게 되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주시는데 육신의 축복도 배나 주셨다.  
자마에 대표로 있는 김춘근 박사란 분이 있다. USC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고 페퍼다인대학에서 가르치던 1976년 그의 나이 37세에 간경화의 불치병 판정을 받다. 생존시한은 1년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빅베어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매달렸다. 6일간 금식기도를 한다. 어떤 날은 새벽 동틀때까지 넘어진 소나무를 붙잡고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듯 매달리며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되찾고 1980년부터 알라스카 주립대학교  교수로 16년간 교수하면서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지금은 모노레이 주립대 국제 경제학 교수로 있다. 그 분이 회복의 은혜를 받은 다음에 자기의 직업보다도, 교수보다도 젊은이 들을 각성시켜서 미국을 변화시키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소경으로 난 자를 보시면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 있다. 저의 죄 때문도,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라 저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하셨다. 고난당하는 성도는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까지 힘들어도 울면서라도 벧세메스의 소처럼 회복의 은혜때까지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3. 회복의 은혜를 받고 난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주실때에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 은혜 받은 자의 삶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 전쟁에 패하고 법궤를 빼앗겼던 이스라엘 사람들! 언제 또 불레셋이 공격해 올지 두려워 떨었다. 저들은 추수때에도 숨어서 탈곡해야 했다. 오늘 본문도 추수때였다. 아마 저들은 곡식을 베다가 눈을 들어 혹시라도 불레셋 사람들이 공격해 오지 않을까 살피곤 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불레셋 군대가 아니라 소가 끄는 수레에 법궤가 오고 있었다. 불레셋 군대가 빼앗겼던 법궤가 돌아옴을 보고 얼마나 기뻤을까 회복의 기쁨! 그들은 그 회복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다. 그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수레를 부수어 나무로 삼고 수레를 끌고 온 두 암소를 제물로 삼아 번제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이 잘못한 게 있다. 기쁨에 들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았다.
하나님앞에 드리는 소는 암소가 아니라 수소를 드려야 한다. 우리말에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는 말이 있다. 그 제사가 바른 제사가 되겠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기쁜 나머지 말씀에 유의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보다는 이 법궤가 어떻게 불레셋을 심판을 해서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가?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대신에 호기심으로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다가 70명의 사람이 죽었다. 기쁨은 두려움으로 변하고 말았다. 무엇을 보여 주시는가?  회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니까 기뻐하며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말씀대로 하지를 않았다. 저들은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데 불레셋에서 보낸 것 가지고 감사를 하고 있다. 불레셋 사람들이 만든 수레를 부수어서 화목을 삼고 그들이 보낸 두 암소를 가지고 제물을 삼아 감사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니었다. 내 것 두고 남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생색만 냈다. 회복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해야 한다. 내 모든 것을 드려서 회복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올라 갈 때가 있는가 하면 내려갈때가 있다. 환난과 시련은 우리의 신앙을 흔들고 다운시킨다. 상실과 슬픔가운데서 하나님과 멀어지고 신앙이 떨어진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완전히 이루신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회복의 은혜를 이루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가야 한다. 말씀을 붙들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회복의 은혜 위에 우리는 우리의 생을 받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주께서 그 은혜를 계속 누리게 해 주실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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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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