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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이

 

 

 

 



  제목 : 나는 어떤 모습일까?
  본문 : 삼상 16:6-8
RevSuh  2013-02-11 11:49:11, 조회 : 2,738, 추천 :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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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모습일까?(삼상 16:6-8)(1/26/03)

나이에 비해 젊게 보이시는 권사님! 요즈음 말로하면 곱게 늙으신 권사님이 그래요. 난 거울보기가 싫습니다. 늙은 모습을 보기가 싫습니다. 거울을 보기 싫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내 모습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거울을 보아야 하고 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젊음은 젊음대로, 늙음은 늙은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 모습은 나만 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 나도 다른 사람도, 눈으로 본다. 그런데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시는 분이 계시다. 겉모양이 아니라 속마음을 보시는 이가 계시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사람의 눈에만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Ⅰ. 사람이 보는 것
왕으로 세움받은 사울은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다 순종하지 않으므로 버림받고 만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사무엘로 이새의 아들 중 한 사람에게 차기 왕으로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다.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을 찾아간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아들에게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해 그 아들들을 하나씩 그의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장자 엘리압이 나타났다. 그를 사무엘은 과연 내 앞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실 자가 있도다 하며 흡족해 했다. 얼굴이 남자답게 잘 생겼고 키가 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니야! 그는 아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다. 내가 사람을 보는 것은 사람들이 보는 것과 같지가 않다. 너는 사람들이 보는 눈으로 사람을 보지 말어! 사람들은 용모와 신장을 본다 하셨다. 우리의 눈은 아무리 좋대도 외모뿐 속을 볼 수는 없다. 겉모습은 볼 수 있어요. 속모습은 볼 수가 없다. 그래 우리 옛말에도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자연히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만다. 오늘처럼 일자리는 적고 일할 사람이 많은 때는 취직이 하늘에 별따기다. 그러니 사람을 골라 쓰는 회사에서는 이왕이면 외모가 단정한 사람을 선호하게 되었다. 따라서 취직을 원하는 여성들은 외모에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 성형수술에 이름 있는 외제 옷에, 핸드백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 되고 있단다. 그러니 취직이 되어도 빚지고 회사에 들어가니 얼마동안 빚을 갚는데 봉급을 다 써야할 판이다. 취직이 안 되면 낭패다. 여자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요즈음에는 남자들도 얼굴을 성형수술로 고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고 해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이니까요. 남보다 나으려면 외모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거지요. 여기 본문에서 용모라는 말은 밖으로 나타난 모습인데 그 말의 의미는 눈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람은 그의 눈에 말하는대로 사람을 판단한다. 그러니 얼굴, 몸매, 체격, 세련된 화려한 의상, 가문, 학벌, 지위, 돈이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취직도, 결혼도, 출세도 이런 외모가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분! 보이는 아름다움이 그 사람의 실상은 아니다. 보통사람보다 어깨 위가 더 있었던 크고 당당한 체격이 보기에 훌륭해 외모를 지녔던 사울은 교만했다. 그 속사람이 외모만 못한다. 그는 쉽게 의심이 많았다. 시기했다. 욕심이 많았다. 왕이 될만한 신앙도 인격도 없었다. 마침내 하나님께 버림받고 말았다. 물론 개중에는 타고난 아름다운 외모나 훌륭한 인격을 함께 갖춘 이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억지로 만드는 외모에는 가짜 상품의 포장이 더 요란스럽듯이 포장용이기가 쉽다. 최초의 범죄도 바로 눈으로 보고 판단한 실수였다.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보니 보암직도 하고 아름다웠다. 먹음직도 했다. 맛있게 생겼다. 그래 견디지 못하고 따먹고 말았다. 그리고 영도, 몸도 다 죽고 말았다. 그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야고보서 2:11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자들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그리고 이렇게 권면한다. 만일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외모로 판단해서 부자는 높은 자리에 가난한 이는 내 발아래 낮은 자리에 앉으라 하지 말라 이는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니 죄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부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만인을 위한 곳이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젊은이도, 나이 많으신 이도, 배운 이도, 못 배운 이도 모두 들어온다. 외모를 보고 선호해서 차별해서는 안 된다. 가난해도 믿음에 부요할 수 있고 부자라도 믿음에 가난할 수도 있다. 요즈음 추세에 따라 교회들도 젊은이, 젊은이 한다. 물론 젊은이들이 많이 들어와야 장래가 소망스럽다. 또 자녀들이 있으니 가르쳐서 일군으로 키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이 많은 이들은 어떤 점에서 주님 앞에 빨리 가셔야 할 분들이니 그들에 대한 전도가 시급한 것도 사실이다. 교회에 유익을 생각하고 젊은이는 환대하고 나이 많으신 이는 홀대해선 안 된다. 따라서 그건 이기적인 생각이다. 교회는 누가 와도 환영받고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대하고 환영하며 사랑하고 사귀며 형제나 자매가 되어 한가족을 이뤄야 한다. 가족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 손자, 손녀가 모두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가족같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육안으로 사람을 잘못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용도 목사가 1931년 2월 18일 재령에 부흥회 인도하러 가는데 부흥회 청한 교회 제직과 신자 여러 사람이 정거장으로 마중가서 기다리던 중 전차가 도착했는데 손님들이 다 내렸는데 아무도 이목사님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교인들이 걱정하며 교회로 가보니 거기 이목사가 와 있었다. 교인들 생각에 이 목사는 배가 툭 나오고 좋은 양복을 입고 나이가 듬직하고 뚜벅뚜벅 위풍있게 걸어 나올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검정두루마기에 중절모자를 쓰고 성경, 찬송들고 마치 학생처럼 죄인인양 얼굴을 들지도 않고 어린애같이 가슴을 웅크리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오는 것이 목사 같지가 않았다. 유명해 보이지도 않고 위엄있어 보이지 않고 당당해 보이지 않아서 알아보지 못하였다. 눈으로 외모를 판단한 교인들은 실수했다. 외모를 보고 판단하면 잘못 판단한다.

Ⅱ. 하나님이 보시는 것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보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시는 것은 사람과 다르다. 7절을 보세요. 얼굴이 아름답고 키가 큰 이새의 아들, 장자 엘리압을 보고 과연 네가 하나님의 기름부을자로구나 라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를 버렸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중심! 다시 말해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보나 하나님은 마음의 눈으로 보신다. 사람은 육신 즉 겉모습만 보나 하나님은 마음속까지 보신다. 따라서 이새의 아들이 8명이었는데 엘리압부터 둘째 아비나답, 삼마 그리고 일곱째까지 다 사무엘의 앞을 지나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두 아니라고 하셨다. 내가 보기에 아니다. 사무엘은 기운이 빠졌고 이새는 희망이 사라지고 말았다. 답답해진 사무엘이 이새에게 네 아들이 다 여기에 있느냐? 아닙니다. 말째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그 아이는 아직 어려서 이 자리에 나올만 하지가 못합니다. 들에서 양떼를 치는 철부지입니다. 사무엘이 그 아이를 데리고 오라! 그런데 바로 그 말째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실 왕이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이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의 왕권을 맡기심이다. 구약시대는 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이 13절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의 성령을 부으심이다. 성령을 붓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가 다윗 안(인격)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속적으로 다윗에게 머물러 계셨다. 그 성령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왕직을 수행할 자격과 능력을 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다윗은 이새의 아들 중에 말째였다. 그는 아버지 이새가 보기에도 왕이 되기에는 제일 가능성이 없었다. 물론 12절에, 그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러나 키가 크고 장대하다는 말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을 왕으로 택하셨다. 왜요? 그의 외모보다 중심, 마음을 보셨다. 중심을 보신다. 그것이 무엇일까? 마음을 보시니 양심일 것이다. 양심이 무엇인가? 함께 아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하나?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이 양심이다. 그 양심이 건강한가? 병이 들었는가?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건강한 양심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자세, 행실이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죄는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안다. 죄를 담아두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정결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깨끗한 마음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니 그 마음이 청결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육신의 모습은 유리 거울로 보나 하나님은 마음의 거울로만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데 그 마음의 거울이 맑고 깨끗해야 하나님이 보인다. 다윗은 마음의 거울이 맑았다. 하나님을 보는 마음이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가? 깨끗한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가? 내 마음의 눈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맑은가?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원하신다.  마음은 어떤 곳인가? 우리의 믿음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다. 얼마나 재산이 많은가? 많이 배웠는가? 지위가 높은 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식이 부족한 자들아, 지위가 없는 자들아 그러지 않으시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신 것은 저들의 믿음이셨으니까요.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니 훌륭했어요. 8명의 아들 중에 말째였지만 믿음에서는 첫째였다. 8등이 아니고 1등이었다. 사무엘상 17장에 가면 불레셋의 거장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와 모욕한다. 그 골리앗을 보고 모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는다. 그와 대결할 장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윗이 전쟁하러 나온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해 전장에 왔다가 내가 나가 싸우겠다고 자청한다. 그리고 마침내 거장 골리앗과 싸운다. 어떻게요? 사무엘상 17장 45절에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가노라!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라. 싸움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은 칼과 창에 있지 않도다! 다윗은 어렸다. 소년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믿음에서는 장성한 자요 장군이었다. 골리앗을 물맷돌로 무너뜨리고 그 전쟁을 믿음으로 이겼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믿음을 보시고 그를 왕으로 세우셨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때에 물론 우리의 탤런트를 보실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요. 섬김의 도구니까. 그러나 중점적으로 보시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을 보시고 큰일을 맡기신다. 따라서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아야 한다. 믿음있는 사람을 일군으로 선출해야 한다. 사도행전 6장 5절에 사도들이 구제까지 손을 대게 되니 구제에 빠지는 이들이 생겨 불평이 생기자 그 일을 집사에게 맡기고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만 하기로 하였다. 그때 집사로 선출될 자격을 믿음과 성령충만하고 칭찬받는 사람으로 말씀했다. 믿음이 우선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나는 어떤가? 나의 믿음은 어느 정도인가?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가?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를 일군으로 쓰신다. 믿음은 말씀에 순종으로 자란다. 순종하자. 말씀과 순종으로 일군이 되시기 바란다.

Ⅲ.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아름다워지나?
여성들이 몸매가 아름답기 위해 무섭게 노력하며 저녁을 굶는다. 매일 운동을 한다. 심지어 기름제거 수술을 한다. 성형수술을 한다. 좋다는 화장품을 값은 상관없이 사서 바른다. 유명상품의 옷을 사서 입는다. 좋은 차를 탄다. 남자는 5-10불 아끼는데 미장원에 가서 100불짜리 머리하고 아예 거울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동차 안에서도 화장을 고치고 바르고 야단이다. 그러고 나면 육안의 눈으로 볼 때 아름답게 보인다. 아니 정말 아름다워진다. 마음의 눈으로 보시는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 아름다운 신자가 되는 것도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아름다운 아내는 어떤 사람인가? 베드로전서 3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한다. 행위로 주신 남편을 구원하는 아내라고 한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겠나?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외모로는 안 된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들, 온유하고 단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이 말씀은 여성 신자는 반지도 끼지 말고 목걸이도 하지 말고 좋은 옷도 입지 말고 미장원에도 가지 말고 화장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치장의 외모를 참 아름다움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니까요. 부드럽고 고요한 정신의 여자다움과 거기서 나오는 거룩한 행실로 단장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속사람, 마음이 아름다우려면 우선 우리 마음속을 들여야 볼 수 있어야 한다. 유리 거울로 우리의 얼굴과 외모를 보듯이 우리는 말씀의 거울로 내 마음속을 자주 들여다보아야 한다. 말씀의 거울로 나를 보면 내 마음이 보인다. 마태복음 15장 19절에 악한 생각, 살인, 미움, 시기, 간음과 음란이 있고 속임과 위중도 있다고 하였다.  

  여러분! 내 마음은 어떤가? 내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보이는가? 더럽고 추악한 죄악들, 회개로 청소해 낼 수도 있고 외식으로 가리우고 덮을 수도 있다. 바리새인들은 후자를 택했다. 나팔불어 사람이 모이면 구제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광장에서 기도했다. 여자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리고 길을 가다가 벽이나 말뚝에 이마가 깨져 피가 흘렀다. 금식한 것을 사람들이 알도록 세면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았다. 겸손하게 보이느라고 아예 곱사등이가 되기도 했다. 육안의 눈으로 보기에 경건했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깨끗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그들을 평가하셨다. 마태복음 23장 27절에 회칠한 무덤이라 하셨다. 겉은 하얗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했다. 외식으로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다. 성령님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한다. 빌립보 2장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하였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나님이신데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시었다. 예수님의 마음은 낮추신 마음,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죄인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하는 마음이시었다. 아프리카에 표범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먹이를 쫒아가는 빠른 발에 있다. 치타는 70마일 속도로 달려간다. 그런데 첫 번째 먹이를 쫒다가 실패하면 곧 포기하고 만다. 치타는 심장이 작다. 쉽게 피곤해진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장, 마음은 너무 작다. 나밖에 모른다. 이기적이다. 이해의 폭이 좁다. 포용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양보하지 못한다.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한다. 쉽게 지친다. 따라서 우리는 타고난 마음을 바꿔야 한다. 넓고 큰 마음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겠나? 마음을 낮추어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겸손히 섬기는 자세로 살기는 힘든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다. 멍에라는 말은 학교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처럼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기를 소원한다면 예수님께서 친절하게 가르치시고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왜 예수의 마음이고 예수님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고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참아들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평생 소원이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함이 되어야 한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삶에 적용해야 한다. 그리하면 예수의 모습이 우리의 마음에서 모습으로, 그리고 생활로 나타나게 될 줄 믿는다.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이 될 것이다. 어느 여성도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자고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리스도가 다음날 오후 4시에 그녀를 방문하신다는 꿈이었다. 그래 깨끗하게 집안 청소를 하고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오후 4시가 되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빨리 거울로 외모를 고치고 나서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문밖 다른 쪽에 괴상하고 더러운 모습을 하고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쇼크를 받고 두려웠다. 그리고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의 대답이 나는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요. 그녀는 재빨리 당신은 내가 아는 예수가 아니요, 그러자 그 사람 대답이 그렇소, 그러나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예수는 아니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예수요.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던 하지 않던 우리의 행위는 주님의 모습을 그린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은 어떤 모습을 그리고 있는가? 아직도 죄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거듭난 성도로 참아들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인가? 여러분! 하나님은 내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양심, 온전한 믿음으로 하루하루의 삶이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가시므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성도들의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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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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