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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이

 

 

 

 



  제목 : 불행의 앞잡이
  본문 : 삼상 18:6-16
RevSuh  2013-03-19 09:24:04, 조회 : 2,556, 추천 :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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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앞잡이(삼상 18:6-16)(2/23/03)

어느 도시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아주 시기심이 강했고 다른 한 사람은 아주 욕심이 사나웠다. 시장이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한 가지 소원을 무엇이든지 그대로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누구든지 먼저 구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두 배를 준다는 것이었다. 시기심이 강한 사람이 어찌 순번을 빼앗길 수가 있었겠나? 그래서 자기 소원을 먼저 구하게 됐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만일 잘못 소원을 말했다가 욕심많은 자가 자기보다 배를 더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 생각 끝에 자기의 왼쪽 눈 하나를 빼달라고 요구했다. 욕심장이 친구의 두 눈을 빼게 하기 위해서였다. 시기는 남을 불행하게 하기 위해 자기의 불행을 자초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왕 사울이 그의 신하 다윗을 시기하므로 불행하게 되는 사실을 기록한 말씀이다. 그러면 시기란 무엇인가? 왜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는가? 시기한 사울왕은 어찌 되는가?
1. 시기란 무엇인가?
우리말 사전에 시기란 말은 샘하여, 미워함이라고 정의했다. 우리 옛말에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란 말과 시기는 잘 부합된다. 성경에서 시기란 말은 다른 사람의 이익이나 번영에 대해 듣거나 봄으로 생기는 불쾌감이다. 그리고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그래서 분개하고 분노한다는 말을 시기로 쓰기도 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3장 45절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선교여행을 시작하면서 구브로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즐겨 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 안식일이 되니 온 성의 거의가 다 바울과 바나바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다. 그들을 본 유대인들이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고 분개한 것이다. 따라서 시기하는 사람은 남이 잘 되면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박수 주기보다 헐뜯고 비난한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정을 안한다. 그런데 이런 시기심은 정도의 차이뿐, 누구에게마다 있는 것이다. 거기서 경쟁심이 나오고 성취와 성공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잠언 4장 4절에 영어성경은 모든 수고와 성취가 그의 이웃에 대한 사람의 시기로부터 난다고 번역하였다. 그러니까 시기란 말이 내가 열심히 일하고 성취하고 성공하는데 동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선한 뜻에서 성취를 위한 동기를 유발하는 대신에 성공한 사람에 대한 시샘이 되고 미워함이 된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시기심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는 욕망이다. 다시 말하면 시기는 타락한 인간의 죄성 중에 하나다. 따라서 바로 다스리지 못하면 불행의 원인이 되기 쉽다.

2. 그러면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시기하게 되나? 이 본문에서 사울은 왜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는가?
사울이 왕이 되어 불레셋과의 전쟁 때 불레셋의 거장 골리앗 때문에 이스라엘은 기도 펴지 못한 채 두려워 떨고 있었다. 그때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오늘 본문 7-8절이 그 반응이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인들이 불레셋을 파하고 돌아올 때 모든 성에서 여인들이 나와 노래하며 춤을 추며 북을 치면서 사울 왕을 환영했다. 그때 그 여인들이 이렇게 노래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사울왕은 그 소리에 그만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승리의 축하도 즐겁지가 않았다. 도리어 화가 치밀어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하였다. 사울왕의 시기가 어디서 왔나? 자기보다 다윗이 더 잘 싸운다. 다윗이 불레셋 적을 많이 죽였다. 공로가 크다. 백성들이 왕인 나보다 목동 소년 다윗의 공로를 더 크게 인정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내가 왕인데 공로 인정도 내가 더 많이 받아야지. 저건 아니지! 그러나 그게 사실이었다. 만만에 천천 그리고 나니 다윗 때문에 다윗이 내 영광을 빼앗아 가고 있어, 질투심이 생겼다. 여기 사울은 이스라엘 군대에 총사령관이다. 그는 용사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왕이다. 그러니 그의 나라에 다윗 같은 용맹스런 젊은이, 전사가 있다는 것은 왕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자랑거리였다. 그가 믿을 수 있는 충성스러운 군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그의 왕권에 영광인가? 그러니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성을 내고 시기했다. 이것이 인간이다.
오늘 우리 교회안에서도 사울의 어리석음이 있다. 이런 일이 종종 목회자 안에서도 있을 수 있다. 부교역자가 담임 목사보다 실력이 좋고 설교를 잘하면 아예 강단에 세우지 않고 심지어 담임 목사가 출타중인 경우에는 부교역자 대신에 다른 곳에서 강사를 초청해서 설교를 하게 한다. 이는 사울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이다. 나보다 나은 부교역자가 있다는 것은 담임 목사에게 축복이 아닌가? 부교역자는 담임 교역자의 뜻을 받들어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가 아닌가? 좋은 부교역자는 담임 목사의 자랑이요 힘이 된다. 더 나아가서 교회의 축복이다. 사울이 되지 말아야 한다. 교인 중에 사울같은 이가 더러 있다. 나보다 신앙이 좋다든지 나보다 능력이 있는 신자가 들어오면 경계하고 시기하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큰 죄악이다. 교회부흥을 막는 일이다. 내 신앙에 기쁨을 빼앗긴다. 나도 일을 못하지만 능력있는 신자로 일을 못하게 만든다. 나도 그도 교회도 모두 손해일 뿐이다. 하나님이 어찌 하시겠나? 나보다 신앙이 앞서고 능력이 있는 성도가 있다. 감사한 일이다. 그는 나에게 더 잘 믿고 더 열심히 일이 잘해야 한다는 동기부여자가 아닌가? 나도 그만큼 더 잘하면 된다. 나보다 나은 사람 끌어내리려 하지 말고 내가 그만큼 올라가면 된다. 이것이 시기를 극복하고 모두가 잘되는 길이다.
왜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는가?
오늘 본문 바로 위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이 불레셋의 거장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것을 안 후에 다윗이 누구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윗을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했다. 왜요? 다윗이 나라와 아버지 사울 왕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웠고 승리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다윗같은 충신을 용사로 얻게 된 것이 정말 기뻤다. 그리고 보니 형제나 다름이 없었다. 사랑의 징표로 자기 겉옷을 벗어 그에게 주고 군복과 칼과 활 등 모든 것을 다윗에게 주었다. 군인에게 군복과 칼과 활은 생명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다 다윗에게 주었다. 생명처럼 사랑하고 신뢰한 것이다. 요나단은 사실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만큼 얻은 것이 없었다. 그 전쟁에서 승리로 제일 큰 득을 본 사람은 사울 왕이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곧 왕 사울의 승리였다. 승리의 축하도 왕 사울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윗을 사랑해야 할 자는 각 성에서 노래하러 나온 여인들이 아니요 요나단도 아니요 사울 왕이다. 만일 그 다윗이 나서지 않았다면그 전쟁을 누가 했겠나?  곧 골리앗에게 졌다면 어찌 되었겠나? 그의 왕권이 설수 있었겠나? 아니 그의 생명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시기하고 미워했다.  왜 이리되었나? 사랑이 없었다. 왠가? 잘못 보았다.
조스 빌리스는 사랑은 망원경을 통해서 보나 시기는 현미경을 통해서 본다고 하였다. 과연 옳은 말이다. 사울은 다윗을 볼 때에 망원경을 통해서 나라를 통해서 나라의 통치자인 왕의 안목으로 이스라엘의 군통수령자의 안목에서 다윗의 승리를 보지 못했다. 자기를 환영하는 군중의 눈으로 다윗의 승리를 보지 못했다. 여인들의 입술로 다윗을 보았고 왕의 신분을 잊고 자신을 전사로 보고 다윗과 비교하니 열등감에 빠졌다. 그래 사랑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입장에서 보라. 하나님의 일, 교회의 사명의 입장에서 보라. 하나님이 선하신 뜻에서 보라. 나와 함께 일할 동역자로 보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좀더 열심을 내고 힘있게 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러니 환영하고 사랑으로 형제삼아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몸에 한 지체가 되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면서 힘을 합해 힘있게 교회를 섬겨야 한다.  나보다 나은 성도로 인해서 나도 교회도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사울은 왜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는가?
8절을 보면 다윗에게는 만만을 내게는 천천을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무슨 말인가? 다윗이 전쟁을 잘하고 백성들에게 이렇게 인기를 끌게 되니 마침내 백성들이 이 나라를 다윗에게 주게 되겠구나? 다윗이 내게서 이 나라를 빼앗아 가겠구나? 그렇게 된다면 내 운명은 어찌 되겠나? 내 아들 요나단은 어찌 되나? 그러고 보니 그는 백성을 믿지 못했다. 또 생명을 걸고 불레셋과 싸워 위기에서 나라를 건진 다윗을 믿지 못했다. 충신으로가 아니라 정권에 경쟁자로 보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나? 그가 믿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고 바로 보지 못고 바로 믿지를 못했다. 사울은 믿음이 없었다. 그를 왕으로 세운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가 원해서 왕이 된 것이 아니다. 백성이 원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어 왕으로 세운 것이다. 하나님을 믿었더라면 이 나라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가겠지 하는 생각으로 다윗을 경계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다윗과 같은 용맹이 있고 나라를 사랑하는 신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하나님을 안 믿으니 백성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여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불신이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하니 충신 다윗을 믿지 못하고 시기하게 만들었다. 본문 9절에 사울은 그날 이 후로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영어성경에는 시기하는 눈으로 보았다고 번역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누구를 시기하게 되나? 그 원인은 사울처럼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 하나님은 누구신가? 사무엘상 2장 6절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신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만일 그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높이셨다면 부하게 하셨다면 어찌 나보다 높다하여 부하다 하여 시기하겠나?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하나님을 찬양할 일이다. 하나님은 항상 옳은 일을 하신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가 빼앗을 수 있겠나? 하나님이 높이신 자를 누가 끌어 내릴 수 있겠나?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누구를 시기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보다 높여주시고 이 믿음이 있을 때 더 부하게 하셨다면 나보다 더 능력있게 하셨다면 결코 그가 나를 해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축복을 선하게 쓸 것이다. 이런 믿음도 우리는 가져야 한다.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사울 왕이 다윗을 적으로 의심하여 잡으려고 쉬지않고 추적한다.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을 때 사울 왕이 3,000명의 군사와 함께 다윗을 잡으러 왔다. 그때 사울이 피곤해서 쉬기 위해 그 곳 굴에 들어가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굴 안에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었다. 사울이 거기 들어와 자는 것을 본 다윗의 부하들!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를 갚게 하셨습니다. 한칼에 죽이소서! 그러나 다윗은 왕의 겉옷자락만 베고 굴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왕의 옷자락만 벤 것으로도 죄책감을 느꼈다. 그가 멀리 가서 왕을 불렀다. 왕이 돌아보자 땅에 엎드려 절했다. 그리고 왕이여 다윗이 왕을 해하려고 한다는 말을 어찌하여 들으십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왕을 제 손에 붙였고 혹이 나로 왕을 죽이라고 권했으나 내가 왕을 아껴 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왕의 옷자락을 보시옵소서. 사울이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소리높여 울며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오늘 내게 선을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갚으시기 원한다 하였다. 오늘 우리가 시기하는 사람이 있나? 그가 다윗일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게 시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그를 믿어야 한다.

3. 시기하면 어찌 되나?  
사울 왕이 시기의 눈을 가지고 다윗을 주목하게 된 후에 사울은 다윗이 하는 모든 일이 맘에 들지 않게 된다. 모두 나라를 그의 손에서 빼앗으려는 악한 계획으로만 보게 된다. 그 결과 다윗을 미워하게 된다. 미워하니 어찌 되나?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그에게 강하게 내리매 그가 야료하는데 그가 예언했다는 말씀이다. 그가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선지자처럼 예언했었다. 아마 지금 악령을 받은 예언은 참된 예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랑이 충만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이다. 그러나 시기가 충만하니 그의 손에 있던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 했다. 다윗이 그 몸을 두 번이나 피해 간신히 살았다. 다윗이 누군가? 지금 악령으로 괴로워하는 그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수금를 타면서 그를 섬기고 있다. 사울 왕은 자기를 위해서 봉사하는 자를 대적하며 선을 악으로 갚으려고 한다. 시기할 때 사탄의 영이 지배한다. 성령은 우리를 살리나 악령, 사탄의 영은 우리를 죽인다. 사울왕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창으로 다윗을 죽이는데 실패한 사울이 어찌 하나? 이번에는 꾀를 내어 나의 손으로 죽이기 대신 불레셋 사람의 손으로 죽이려고 한다. 다윗에게 딸 미갈을 주는 조건으로 불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결혼 지참금으로 요구했다. 다윗은 그의 종들과 함께 가서 불레셋 사람 200명을 죽이고 그 양피(모피)를 왕께 드렸다.
그러나 사울의 시기와 미움은 다윗을 죽이기까지 쉬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사울로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게 하였다. 온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윗을 사랑하는데 사울만 미워하게 된다. 민심이 그에게서 떠났다. 원수 대신 충신을 죽이려고 따라다니다가 마침내 자신이 먼저 죽고 만다. 불레셋과 갈보아 전투에서 적의 활을 맞고 자기 칼에 엎드러져 자살로 생을 마쳤다. 그만 아니다. 그의 세 아들과 그를 따르는 병기 든 자 모두가 다 죽고 만다. 사울왕은 선민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되었으나 왕대가 끊기고 말았다. 시기는 불행의 앞잡이가 되어 사울을 미움의 사람으로 불신의 앞잡이로 만들었다. 악령에 지배되니 충신이요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미치광이처럼 살다가 불행하게 자살로 생을 마치므로 아들들에게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온 백성에게 큰 불행을 안겨주고 말았다. 결국 사울은 그가 우려한대로 그가 가장 나쁘게 생각한대로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생명을 잃고 나라도 잃고만 것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큰 아들 가인과 아벨이 어느 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곡물을 제물로, 아벨은 양을 제물로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무슨 이유일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제사만 받으신다. 그러니까 가인은 믿음없는 제사를 드린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법대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고 응답받지 못한 것이다.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런데 가인은 그것이 동생 아벨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동생 아벨만 없었다면 내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셨을텐데, 그래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했다. 미워했다. 그리고 어찌했나?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땅에 묻어버렸다. 그리고 어찌 되었나? 어디를 가든지 땅이 그를 받아주지 않는 도망자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나 나를 죽이지 않을까 두려움에 떠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되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형제가 하나님을 예배하다가 하나가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그 이래도 우리 교회의 역사는 불신자에 의해서보다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자들에 의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받고 죽었다.
최근에 어느 한국 목사님이 기독교의 죄악사란 책까지 썼다.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시기는 미움을 낳고 미움은 살인을 낳는다. 살인은 죽음의 심판을 부른다. 그러므로 시기는 불행의 앞잡이다.  
여러분! 나보다 공부 잘하고, 사업 잘하고, 더 인정받고, 믿음이 좋고,  나보다 나은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못한가? 그건 그만큼 정직하게 노력한 결과요 하나님이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기하지 말자. 시기는 나도 남도 다 불행하게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죄다. 우리는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예수 믿고 거듭난 자의 성품을 따라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내 유익을 구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 시기하지 않는다. 여러분! 이 사랑으로 나보다 나은 자와 기쁘게 더불어 살아가며 더 나아가 함께 주님의 몸된 지체가 되어 서로 합력해서 주의 일을 힘써 하자. 그리하여 나도 그도 교회도 하나님의 평강과 축복이 넘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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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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