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갈 1:2)
이 구절에서 문제는 갈라디아서가 어느 지역에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쓴 것인가로 논란이 있다는 데 있다. 갈라디아는 고올 인들에 의해 차지된 원래의 지역으로서 소아시아의 북쪽 중앙 부분에 위치한 곳이 있었다. 그러나 밤빌리아의 루기아(Lycia)변경과 안디오커스(Antiochus)의 왕국에까지 남쪽으로 확장된 전 로마 지방이 역시 갈라디아였다. 그런데 여기서 어느 지역의 갈라디아에 썼는지의 문제는 장소만 아니라 연대적인 질문도 포함된다. 만일 바울이 남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썼다면 본서는 그의 첫 번째 선교 여행 직후인 초기 작품이 된다. 그러나 만일 본서가 북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썼다면 본서는 그의 세 번째 여행 때 아마도 그가 로마서를 썼을 때 기록했을 것이다.
북부 갈라디아 설 북부 갈라디아 설을 따르면 바울은 그가 드로아로 가는 길이었던 그의 제2차 여행 때까지는 그 고을을 방문하지 않았다(행 16:1-8). 비슷한 여행이 사도행전 18:23에 언급되었다. 바울의 이 지방에 대한 첫 방문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회의 후였을 것이며 본서의 저작 시기는 그의 제이차 선교 여행 후인 주후 53년에서 56년의 어느 때였을 것이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유사성은 본서가 분명히 후대의 연대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J.B. Lightfoot). 그런데 이 북갈라디아 설은 초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지지받았을 뿐 아니라 북갈라디아의 고올 족들이 특별히 변덕스럽고 다투기를 잘하고 분내기를 잘하는 것이 특성이었으므로 본서의 내용에 더 가깝다. 또 북부 갈라디아 지역은 이방인이 많았으며 본서의 수신자의 대부분이 이방인들이었다. 특별히 본서에서 크게 다루고 있는 율법이나 할례는 이방인들에게 더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남부 갈라디아 설 이 설에 따르면 바울은 그의 첫 선교여행 때 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오 그리고 루스드라와 더베와 같은 남부 갈라디아에 교회들을 세웠다. 그의 서신도 예루살렘 회의 전에 썼을 것이며 갈라디아 2:1에 언급한 예루살렘 방문은 사도행전 11:27-30에서 언급한 기근 구제의 방문을 가리킬 것이다. 후에 바울은 이런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였다(행 16:1-6; 18:23). 남부 갈라디아 설(William Romzay, Tenney, Riderbus, F.F. Bruce, Longnecker 등이 지지)에서는 북갈라디아의 교회들이 후에 와서야 알려지게 되었으며 또 바울이 예루살렘의 구제 헌금을 가지고 갈 때 그 대표들 중에 남부 갈라디아 출신이 있었고,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남부 갈라디아 지방을 방문했을 때 그를 뒤쫓아 갔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남부 갈라디아 설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한 논증은 만일 바울이 예루살렘 공회 후에 본서를 썼다면 그는 확실히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이방 신자의 자유를 찬성한 공회의 결정에 대한 언급을 했을 것이다. 또 베드로의 우유부단함(갈 2:11과 뒤이어 나오는 구절들)은 공회의 결정 후라면 잘 맞지 않는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잘 알려졌을지라도 바나바의 언급은(1, 9, 13) 남부 이론을 선호하게 한다. 이런 모든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본서는 주후 49년 가을 그의 첫 번째 선교여행을 끝내고 같은 해에 안디옥에서 썼을 것이다.1) 주 1. J. Carl Laney, Answers to tough Questions, pp.27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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