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중세 교회와 이단(590-1517)


중세 가톨릭 교회는 지상 교회의 유일성과 통일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중세는 가톨릭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였다. 이런 교회의 경향은 가톨릭 교회가 중세를 지배했던 로마의 국교가 되고 제국의 통일성에 집착했던 황제들의 정책과 맞물리면서 더 강화되었다. 로마에는 오직 한 교회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서나 안에서 발생한 사상이나 조직의 활동은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되고 이단으로 지목되기가 쉬웠다. 중세 교회는 초대교회의 사도적 전통의 교훈에서 비롯되고, 교회의 전체 회의를 통해 작성되고, 공인된 신조와 교리 그리고 교황을 중심으로 한 계급제 성직 조직의 위계 질서에 근거해서 이단을 판단했다.
중세에 이단으로 지목되는 운동이 적지 않았던 것은 교회가 계급제의 조직을 갖추게 되면서 교회의 머리인 교황이 국가의 수장인 황제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세속화된 데도 그 원인이 없지 않았다. 종교와 정치가 통합의 길을 걷게 되면서 성직자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탐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도덕적 부패와 부정이 심화되었다. 교회가 세속화되고 사제들이 목회를 등한히 하자 신자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사치하고 성경에 무지했던 사제들에 대한 불신으로 청빈과 설교를 강조한 운동이 있었고, 영적인 만족을 추구하던 신자들은 신비주의 운동에 가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또 긴 시간 지적 동면으로부터 지성이 깨어났던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다양한 종교적 해석이 만발했으며, 이에 따라 정통주의 범주 안에서도  신비주의와 이단사설이 발생할 분위기였다.1)
이에 대해서 요한은 중세 이단 발생의 원인을 여섯 가지로 파악했다. ① 예언자들의 종말에 대한 선포로 인한 사회적 공포심의 증대 ② 이에 대한 반응으로 종말신앙의 실천 ③ 성경적인 경건과 실천의 요구 ④ 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 필요한 규칙으로서의 엄격한 제도의 규범 ⑤ 교회 지도자의 무지와 권력의 남용 그리고 ⑥ 지역적 국가 혹은 민족적 반발.2)
그러므로 중세의 이단이나 그 판단 기준은 자연히 초대교회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초대교회의 초기 이단은 기독교의 철학화나 기독교의 유대주의화였다. 그리고 점차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신앙의 교리를 신학화 내지는 이성적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고민의 표출로, 특별히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 대한 논쟁의 산물이었다. 저마다 정통 교리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함으로써 이성의 한계를 넘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기보다는 이해하려고 했다.
따라서 이단의 판별 기준은 자연히 성경이었고,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이었으며, 전체 교회 회의에서의 토의를 거친 합의였다.
그러나 중세의 이단 판단의 기준은 교리적인 것보다는 교회의 통일성이나 연합 그리고 제도적인 교회의 위계 질서에 대한 반대나 비판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중세 교회의 이단은 정통 교리 말씀 중심의 원리, 그리고 사도적 교훈에서 탈선으로 보는 대신 교황 제도의 가톨릭 교회를 대적하거나 이탈하는 무리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제1장 이원론적 이단

중세의 이원론적인 이단은 옛 마니교의 형태였다. 또 영지주의와 말시온과 비슷한 엘리트주의도 포함된다. 이들 중에 알려진 사람은 보고밀(Bogomils)인데 슬라브 언어로 보고밀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다. 그 창시자는 크자르 피터(Czar Peter, 927-69)로서 그는 개종한 후에 불가리아에서 살았으며 아마도 사제였을 것이다. 원래 이 파는 예레미야로 불려지다가 후에 보고밀로 스스로를 호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에 먼저 살펴볼 것은 파울리키안(Paulicians)들이다. 이들은 온건파 이단으로 동방 가톨릭 교회 안에 지금도 존재한다.

1. 파울리키안파 Paulicians


1) 기원
이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바울 사도로 보며, 그들의 이원론적 견해는 마니교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아르메니아(Armenia)에서 시작되었을 텐데 아르메니아는 동 로마제국과 제휴했다. 첫 창시자는 칼리니스(Callinice)와 그녀의 두 아들 바울과 존(Paul and John)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7세기 중반 아르메니아 프리마 지방 키봇사(Kibossa)에서 출현한 콘스탄틴이 창시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바누스(Sylvanus)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27년 간 활동하다가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후계자는 시므온(Simeon)이었는데 티투스(Titu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 유스티니안 2세(Justinian Ⅱ)의 정부에 의해 690년 화형에 처해졌다. 스페인 출신 투린(Turin)의 클라우드(Claud)는 가톨릭의 성상 숭배에 대항했고 자신의 교구 내에 있는 모든 성화와 성상을 파괴했다. 십자가 숭배를 부인하고 성지 순례를 정죄했고 유일하게 갈라디아서 주석을 출판했다. 그는 교회의 전통을 거부하고 모든 사도들은 베드로와 같으며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했으며 주교들과 장로들은 차등이 없이 모두 동등하다고 했다.
가장 유명한 지도자는 티키우스(Tychieus)로 불리던 세르기우스(Sergius)로 801년 공생애를 시작했는데 그의 추종자들은 소아시아 지방 동부 지역에 급격히 확산되었다. 그는 레오아르메니안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추종자들은 사라센 쪽으로 이주하여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지역에 거주했다. 10세기에 보다 많은 바울파들이 아르메니아(Armenia)와 소아시아(Asia Minor) 트래이스(Thrace) 그리고 불가리아(Balgaria)와 슬라보니아(Slavonia)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박해가 발생하자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이주했고 이들 중에 성상 숭배와 제사장의 권력을 반대한 자들은 알비게네시스(Albigeneses)로 불렸다.3)

2) 교리
윌리엄 캐논(W. R. Cannon)은 이들의 교리를 아래의 여섯 가지로 요약했다.
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최초로 스스로를 계시하셨다. 따라서 구약의 하나님은 단지 조물주(Demiurge)에 지나지 않으므로 인간들은 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⑵ 교회는 신약전서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정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존재들이다.
⑶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로 인정할 수 없다.
⑷ 마찬가지로 성찬 역시 구세주의 몸과 피로 볼 수 없다.
⑸ 그리스도 자신만이 영생으로 이끄는 정화수(The cleanning Water)이므로 세례는 인정할 수 없다.
⑹ 신성과 인간의 육체 사이에 진정한 연합을 부정하는 성육신의 가현론이 주장되었다.
그밖에도 바울파는 교회의 계급적 조직을 완전히 부정하고 만인을 위한 신약의 지식과 더불어 사도적 설교의 단순한 신약 구조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신자들을 위한 비밀의 지식과 예식을 포함한 톤드라키안주의(Thondrakians), 영지주의 및 고대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 지방의 미신적 사상들이 원래 바울파의 신조에 스며들어 갔다. 그들의 중요한 주장은 기도나 헌신은 죄를 용서받는 데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금욕주의의 용어로 소개된 선한 생활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다.4)

3) 관행
이들은 신자들을 완전한 자들(the perfect)과 귀의자나 문도들(the hearers)로 구분했으며, 전자는 성교는 물론이고 어떤 종류의 육류도 금했다. 또 유아 세례를 거절했으며 예수님을 그들의 표본으로 삼아 30세가 되면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문도들은 세례만 받도록 했으며 그들이 죽기 전 어느 때엔가 집례하도록 했다. 이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돌리는 영예를 거부했으며 성자들의 이름들을 불러 기도하는 것, 초상들의 사용, 분향, 촛불, 그리고 모든 물체적 상징들을 배격했다. 또한 밤에 성례를 거행했으며 포도주 대신 물을 사용했다.5)
바울파는 여러 면에서 마니교의 이원론 사상에 크게 빚진 이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문제의 본질은 이원론에 있었다. 물질을 악하게 보고 물질을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을 악신으로 보면서 예수님의 신성까지 부인함으로써 영지주의처럼 가현론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십자가의 죽음이나 몸의 부활도 믿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들의 가톨릭에 대한 비판을 볼 때, 개혁을 주장한 점은 옳았으나, 모든 것을 무조건 배격한 것은 신앙의 관습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었으며, 신자들의 구분은 교회의 연합을 깨뜨리는 인위적이고 비성경적 관행이었다. 또 극단적인 금욕 생활은 이원론 철학에 근거한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의 선함을 부정하는 오류였다.

2. 보고밀파 Bogomil


보고밀파는 자신들의 감독을 중심으로 지하 교회 조직을 갖추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다. 황제 알렉시우스는 그의 치세 마지막 2년을 남겨두고 보고밀 운동에 직면하게 되자 그 운동에 관심이 있는 척하면서 보고밀파 감독 바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황제는 보고밀 교리의 설명을 듣고 난 후 그의 잘못된 교리를 철회할 것을 종용했으나 바실이 거부하자 그를 감옥에 가뒀다. 황제는 그에게 개종을 권유했으나 끝까지 거절하자 그를 화형에 처했다.

1) 사상
보고밀주의는 바울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의 신조는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이었으며 마니교와 영지주의와 닮은 점이 많았다. 이들의 교리나 신조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처럼 선과 악의 두 가지 영원한 원리를 가르쳤으며, 유일한 신의 장자인 사타나엘(Satanael)의 모반의 결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원론을 정립했다.
영적으로 최고의 존재인 하나님께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사타나엘이고 차자는 예수다. 장자는 모반으로 하늘에서 쫓겨났으며 물질계와 사람을 만들었으나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고, 사람은 분리된 존재가 되었다. 예수님이신 말씀이 세상에 와서 사타나엘을 패배시킴으로써 그는 능력을 잃고 자신의 이름 어미에 붙었던 ‘엘’도 상실하여 단순히 사탄이라는 이름만 가지게 되었다. 사탄은 지상에서 잃었던 세력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 신실한 자들, 즉 보고밀들과 함께 살게 했다. 종말에 성령은 하늘로 승천할 것이고, 말씀과 함께 성부에게로 다시 합쳐질 것이다.
보고밀파의 오류는 이원론적 신관에 있었다.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부인하는 것은 마니교나 영지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삼위일체가 있을 수 없었고, 말씀과 성령 역시 인격체가 아니며, 사탄은 예수(말씀)의 형님으로 악한 능력이었다.
이렇게 보고밀의 교리가 잘못된 것임이 분명했지만 당시 일반 신자들은 기독교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을 만한 지식이 없었다. 게다가 보고밀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가톨릭 교회의 신자나 사제들보다 더 열정적이고 순결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저들은 정통 교회와 보고밀은 세례와 성찬에서만 차이점이 있다고 보았을 뿐이다.

2) 관행
보고밀주의는 그리스도는 가현적이며 외형적으로만 인간이었으며 실제 성육신은 없었다고 보았다. 이들은 구세주를 피살했다고 하여 십자가를 증오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마귀의 본부였기에 이제 그들은 기독교계에서 최고의 교회가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Hagia Sophia)를 본부로 삼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 역시 바울파처럼 신자들을 보통 신자와 선택된 자들로 나눴다. 선택된 자들은 구별된 의식과 특별한 공회를 통해 선출한다. 택자들을 위해서는 환상적인 의식이 거행되었다. 처음에는 동정녀 마리아와 동등하고 다음은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려지는데, 이는 각자가 성령이 거하는 전이며 말씀을 낳은 자이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되는 기도에서는 ‘우리 아버지께만 간구를 드린다’고 했다.6)
보고밀 운동은 15세기 터키인들이 발칸 반도를 정복할 때까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터키인들이 1393년 공격할 때는 불가리아에서 전멸되었다. 그들은 서쪽으로 가서 보스니아(Bosnia)와 달마디아(Dalmatia)에 이르렀으며, 그곳의 추종자들을 파탈린(Patarines)으로 불렀다. 보고밀주의는 15세기가 되면서 사라졌다.

요약과 평가

보고밀파 역시 바울파처럼 이원론이 그 중심 사상이었고,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으며, 창조를 성경대로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사탄과 예수님을 형제로 본 그들은 타락한 천사와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아들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 삼위일체도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3. 카타리파 Cathars


카타리파는 보고밀파의 후예로 알려지는데 12세기 알비게네스(Albigeneses)의 분파로도 알려지고 있다. 카타리란 이름은 교회사에서 다른 시기에 다른 분파에 적용된다. 제3세기에 노바시안(Novatian)에게도 적용되었는데, 이들은 세례 후에 범죄한 자들을 교회에서 추방시켰다. 또 12세기에는 알비게네스파(알비파)에게 적용했다.7)
원래 ‘카타리’라는 이름은 ‘생활과 삶의 방식에서 순결함을 목적으로 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순결한 자나 청교도에게도 적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단으로서 카타리파는 그들의 삶이 순결과 방탕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카타리파는 1209년 십자군 운동 당시 약 4백만 명이었다. 따라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교회의 통일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십자군을 파견하여 카타리파를 박해했다. 그리고 1231-1233년에는 이들의 박멸을 위해 종교 재판을 실시하기도 했다.8)

1) 기원과 교리
카타리파는 바울파와 보고밀파와는 구별된다. 그러나 이들 두 파와 마찬가지로 마니교의 이원론을 따랐다. 즉 물질은 악하며 악신이 통치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신은 선신과 악신이 있으며 영원부터 서로 싸운다고 믿었다. 카타리파를 중세의 마니교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원론에 근거해서 우주는 선신과 악신의 투쟁장인데 구약의 신은 악신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악한 물질계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악신은 선신처럼 영원하다고 보았다.
이들에 의하면 어떤 영혼들은 악한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런 자들은 모두 흉악한 범죄자들이며 폭도이며 박해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의 원수다.9)
다른 사람들은 선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는데 목적을 위해 아름답고 빛난 천사로 자신을 가장한 사탄에 의해 하늘에서 꾀임을 받았다. 그 결과 정죄되었으며 몸으로 행한 죄를 속하기 위해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환생하게 되는데 형벌로 인해 심지어 동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침내 참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허락됨으로 지상의 지옥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지옥은 영혼이 육체인 몸에 갇힌 것이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고 이 구원에는 도움이 필요한데 악신의 여호와에게서가 아니라 선신인 예수에게서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천사장일 뿐이며 그의 책무는 육신에 갇히는 신적 섬광을 자유하게 하기 위해 스승이 되는 것이다.10)
따라서 카타리파의 죄와 구원관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가 아니었다. 저들이 보기에 가장 큰 죄는 아담과 하와의 원리이며, 인간은 생식에 의해 감옥의 수가 증가된다. 그리고 구원은 회개와 금욕적인 삶 그리고 보상으로 된다. 이 구원의 의식은 교회에서 세례와 같은 것으로 죄의 용서와 선한 하나님의 왕국으로 회복게 한다. 세례는 세례 받은 자의 손을 세례 지원자 위에 얹는 것이며 이 안수와 더불어 세례 후보자의 머리에 요한복음을 올려 놓았다. 이것이 참된 사도적 승계다.
그런데 이렇게 안수의 세례를 받은 자는 완전자(Perfectus)가 되며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결혼과 맹세를 피하며 전쟁을 하지 않고 재산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 또 고기나 우유 혹은 계란을 먹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생식의 죄의 산물들이기 때문이다. 이 완전자들을 프랑스에서는 선한 사람들(bons hommes)로 부르며 카타리파의 참 목사들이다. 카타리파에는 심지어 감독들과 교황까지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의 교인들을 신자라고 불렀다(Credentes). 이들에게는 결혼이 허용되었으며,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길 수 있었다. 심지어 외적으로는 로마 교회를 따를 수도 있었다. 다만 죽기 전에 세례(Consolamentum)를 받아야 했다. 이 세례(안수)를 받지 않고 죽은 자는 대부분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심지어 동물로 태어나지만 마지막으로는 그들 역시 구원받게 된다.11)
이렇게 카타리파에서 세례는 구원에 필수였다. 그러나 교회의 성례는 반대했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경멸 때문이었다. 교회의 세례를 배척하는 것은 그 세례가 물질의 물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었으며 다른 성례의 요소들인 성찬의 포도주나 떡도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대했다. 그와 같은 성례는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성례가 아니었다. 그것은 속이는 것이며 마귀적이고 해로운 것이었다.12)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며 죽으신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가 아니며 혐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2) 성경관
카타리파는 성경을 중요하게 사용했다. 그들은 성경을 번역하고 그 안에서 그들의 가르침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떤 카타리파 사람들은 구약을 전부 마귀의 역사로 배척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시편과 선지서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두 신약을 선한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믿었다.13) 신약에서도 요한복음을 가장 선호했다.
카타리파의 성경 해석은 모두 영적이었다. 성경을 많이 인용하기는 하지만 기적에 대해서는 영적 해석을 하며 비유를 자유롭게 알레고리화한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강도들 가운데 쓰러진 자는 아담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의 영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으며 이 낮은 세상에서 도적들 가운데 드러누워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카타리파는 성경관뿐만 아니라 성경의 해석에서도 크게 빗나간 이단이었다.

3) 윤리
카타리파의 윤리 역시 그들의 물질이 악하다는 원리를 따른다. 물질계는 악한 자의 역사로 창조되었기에 악하며, 그 물질과 접촉하는 모든 것은 죄로 이끌린다. 따라서 죽을 죄 중에는 부, 전쟁, 동물을 죽이는 것, 결혼 안에서나 밖에서의 육체적 연합이 포함되었다.14) 그러므로 이 집단의 도덕적 생활은 금욕주의였으며, 자기 부정의 정도에서는 가장 엄격했던 수도원을 능가했다. 더 나아가 심각한 육체적 고통을 경험할수록 더 많은 영적 보상을 획득한다고 믿었다. 선행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은 순교자로 죽는 것이었다. 또 죽음의 방법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자살을 택하기도 하고 노령의 부모를 질식시켜 살해한 예도 있었다고 한다.15)
이들은 합법적인 결혼보다 근친상간이나 간음죄가 장래에 더 중한 형벌을 받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런 죄는 결혼처럼 지속적인 성적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정상적인 이성의 교제는 재생산적인 죄를 낳기 때문에 부정적이었고 그 대책으로 다양한 종류의 성생활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세속적인 남색(bugger)이란 말이 발칸 반도에서는 보고밀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16) 이런 경향은 물질이 악하며 영의 선과는 분리된다는 이원론적 사상 때문에 빚어질 수 있는 성적인 방종이나 타락이었을 것이다.

4) 예배
카타리파의 예배 및 의식은 적고 단순했다. 예배 장소엔 장식이나 십자가 그리고 성상이 없었다. 예배당의 한 쪽 끝에 천으로 덮은 검소한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신약성경이 놓여 있었다. 예배의 내용은 성경 읽기, 성경 해석, 그리고 기도였다.
이들은 정통 교회의 예배는 감각적이라고 보고 성직복을 배교의 몸통으로 간주했다. 그들 자신들만이 하나의 참된 교회였다.
보고밀파의 경우에는 감독제의 계급이 있었고, 각 감독은 그들을 후계할 큰 아들과 막내아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는 보고밀파의 삼위일체 교리의 반영이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고, 아들이 성령을 낳았다고 생각했다.17)

5) 조직
카타리파에는 네 개의 직분이 있었다 : ① 주교 ② 대 필리우스(Filius Major) ③ 소 필리우스(Filius Minor) ④ 집사(Deacon).
대 필리우스는 회중에 의해 선출된 목회자들이며, 주교는 전체 행정의 수장으로 목회자의 공백이 생길 때마다 대 필리우스 출신으로 채웠다. 집사직은 다른 계급들을 보조하는 행정직이었고, 소 필리우스들은 심방을 담당했다.
안수 예식(세례, Consolamentum)은 회원 가입의 입문 예식이기도 했으며, 성찬식은 탁자에 둘러서서 주기도문을 크게 낭송하는 중에 대 필리우스가 빵을 나눠 주는 간략한 예식이었다.18)

요약과 평가
카타리파는 영은 선하며 물질은 악하다는 잘못된 이원론 사상에 기초한 이단이었다. 따라서 창조의 아름다움을 악으로 보고 창조주요 피조물의 아버지로 사람을 지으시고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주신 구약의 하나님을 악신으로 보고 가정과 자녀 출산을 죄로 정죄했다. 또한 구약성경을 마귀의 산물로 폄하하여 신약과의 연속성을 부인했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을 부인하고 예수와 구별하며 가현설을 주장했다. 이런 육신(몸)에 대한 부정적인 사상은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부추겨 결혼이나 성적인 접촉을 금했으며 생식에 의한 산물을 음식에서 제외시켰다.
이런 관행은 모든 사람이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자연히 그들의 교회 안에서 신자를 엘리트(완전자) 신자와 보통 신자로 규정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영적이라고 자처했던 사람들은 물질적인 일과는 상관이 없다며 방종과 방탕에 빠지기도 했다. 이렇게 카타리파는 신앙적으로나 관행상으로 금욕과 방종이라는 극과 극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카타리파 지도자들의 엄격한 금욕주의는 교회의 금욕주의 수도원 운동에 일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4. 아말릭파 Amalricians


아말릭파는 베나(Bena)의 아말릭(Amalrich, ? -1204)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존 스코투스 에리게나(John Scotus Erigena)의 작품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스페인 모하메드 해설자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의 극단적인 신 푸톤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처럼 신자들 안에서 성육했으므로 자신은 물론 신자들도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유대인의 율법과 의식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기된 것처럼 초기 기독교의 법과 의식이 이제는 성령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다고 주장했다.19)
따라서 아말릭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는 만신론자들이었으며, 하나님은 자신을 세 번 계시하셨는데 매번 보다 더 완벽하게 계시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시대를 구분하여 아브라함 안에서 성육신의 성부 시대가 시작되었고, 마리아 안에서의 성육신에서 성자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아말릭파 안에서의 성육신으로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옥은 없고 죄의식만 있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한 지체임을 믿어야 하지만 이 신앙이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20)
아말릭의 가르침은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Ⅲ)에 의해 취소를 강요받았으나 이단으로 규정된 ‘자유정신수도회’(Brothers and Sisters of the Free Spirit)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서 번성했으나 16세기경에 소멸되었다.

요약과 평가

아말릭파는 철학과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단으로 신자는 죄를 범할 수 없다는 완전주의자들이었다. 이런 경향은 신비주의 신앙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강조한다. 이 합일은 묵상 운동으로 이루어지며 이렇게 하나님과 합일이 이루어진 자의 행동은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합일이 된 후로는 하나님에 의해 온전히 통제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따라서 모든 성례나 회개 기도까지도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아말렉파는 성부 시대와 성자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며 이제는 성령 시대인데 그들은 성령과 함께 새 시대를 열었으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에 죄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이미 완전해졌으므로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고, 죄인이라며 죄를 거듭 회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증거이며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한국 교회의 구원파와 유사했다. 아말릭파는 율법이 폐기되었을 뿐 아니라 초기의 기독교법과 의식이 다 폐지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규례에서 온전히 자유했으며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어떤 기준도 없었다.

5. 베가르회와 베긴회 Begahards and Beguines


베가르회(Beghards)라는 말은 회원들이 입던 고해 복장의 색체인 ‘bega’(어두운 갈색)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서원이나 수도 규칙이 없이 수사와 같은 삶을 살려고 했던 남성들이었다. 이들은 12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로마 가톨릭 평신도 자매회였던 베긴회(Beguines)를 따라 13세기에 프랑드르(Flanders)에서 시작된 평신도 형제회였다.21)
베가르회는 인간은 그 이상 진보할 수 없고 어느 것도 그에게 죄가 되지 않는 그런 삶 속에서 완전무결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를 반대하여 모든 의식은 완전을 방해하는 요소일 뿐이며, 사람은 율법에 종속되지 않고 성례나 금식 기도와 기도는 필요치 않다고 했다.
베긴회라는 말은 ‘기도하다’는 뜻의 고(古) 프랑드르어인 ‘beghen’에서 파생되었다. 이 회는 공동체별로 자급자족의 형태를 취했으며 자체의 규약과 규칙들에 따라서 생활했다.22)

사상과 교리
베긴회의 사상으로는 세례는 단지 죄를 씻는 것일 뿐이며 덕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고, 합리적 영혼은 육체가 아니므로 그리스도께서 창에 찔렸을 때도 아직 살아 계셨다고 주장했다.23)
베긴회의 지도자로 알려진 포레트(Porete)의 마가렛(Margaret)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영의 멸절을 주장하는 책을 썼는데 그 상태에 도달했을 때 개인은 양심의 가책이 없어지며 본성의 욕망에 대한 어떠한 탐닉도 허락된다고 했다. 마침내 마가렛은  1310년 파리에서 그녀의 책과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24)
이들에게 속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유 정신의 형제들(The Brother of the Free Spirit)은 만신론적인 신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빈곤의 모형으로 삼고 실천적인 가난에 힘썼으며 이것이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을 향한 비판이 되면서 교회의 제재와 박해를 받는 이단이 되었다. 이들은 비엔 회의(The Council of Vienne, 1313)에서 교황 요한 22세(John XXII)에 의해 정죄되었다. 요한 22세는 빈곤이 인간을 세속 성직자들과 교황들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며 재산은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소치라는 영적 형제단의 주장을 분쇄시켰다.25) 이런 사실로 보아 베긴회와 베가르회 모두가 빈곤을 실천한 수도회였음을 알 수 있다.

요약과 평가
베가르회나 베긴회 모두 순수한 평신도들로 모인 자원 수도회라는 점과 청빈한 삶을 힘썼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베긴회는 성경과 교리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이 부족함으로써 신비주의와 만신론에 빠졌고, 양심에 어떤 거리낌도 없이 부도덕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도덕 불감증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경향은 그들의 신비주의나 만신론적인 신관의 귀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평신도 중심의 종파나 분파 운동의 문제점은 성경에 근거한 건전한 신학적인 안내나 지도 없이 영적인 완전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주>
1) 윌리암 R. 캐논, 중세 교회사, 서일영 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264.
2) 서요한, 중세 교회사(서울: 그리심, 2003), 363-368. 이단 발생의 요인들을 크게 보아 사상적, 정치적, 종교적 요인에 따른 것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정치화되고 세속화된 중세 교회에 대한 반발이요 개혁의 촉구였다.
3) Joseph H. Lynch, The Mediveal Church(London: Longman, 1992), 225-227.
4) William Ragsdale Cannon,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Middle Ages(Grand Rapids: Baker, 1983), 115.
5) 케니스 래토레트, 기독교사(상), 윤두혁 역(서울: 생명의말씀사, 1979), 457.
6) 해롤드 브라운, 교회사 안에 나타난 이단과 정통, 라은성 역(서울: 그리심, 2002), 367-371.
7) 프랑스에서 카타리파는 알비(Albi) 지역에서 번성했기 때문에 알비파(Albigensians)로 불렀다.
8) 서요한, 중세 교회사, 385.
9) John Mc Clintock and James Strong, Encyclopedia of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Literature, Vol.Ⅱ(Grand Rapids: Baker, 1981), 156.
10) G.S.M. Walker, The Growing Storm(Grand Rapids: Eerdmans, 1961), 151.
11)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70), 228-229.
12) Henry C. Scheldon,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2(Peabody: Hendrickson, 1988), 235.
13) Williston Walker, op.cit., 229.
14) John McClintock and James Strong, op.cit., 156.
15) William R. Cannon, op.cit., 215.
16) 해롤드 브라운, 교회사 안에 나타난 이단과 정통, 라은성 역, 377.
17) J. G. G. Norman, “Cathari”, The New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150.
18) 윌리암 R. 캐논, 중세 교회사, 268.
19) Williston Walker, op.cit., 255.
20) 김영무, 김구철, 이단과 사이비(서울: 아가페, 2004), 73.
21) 케니스 래토레트, 기독교사 (중), 윤두혁 역(서울: 생명의말씀사, 1993), 110.
22) 김영무, 김구철, 이단과 사이비, 76.
23) 윌리암 R. 캐논, 중세 교회사, 380.
24) Philip S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VI(Grand Rapids: Eerdmans, 1974), 58.
25) 윌리암 R. 캐논, 중세 교회사, 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