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반 성직주의 이단



1. 피에르 드 브뤼이 Peter of Bruys, d.c. 1140

페에르 드 브뤼이는 론 강 어귀에 인접한 프랑스령 알프스 지방 브뤼이에 있는 작은 마을의 사제였다. 그러나 자기 교구에서 추방된 이후 피에르는 론 강과 나란히 서 있는 지역에서 이단적인 선동가로 활동했다. 그는 1119년경부터 1140년까지 약 20년 동안 활동했으며 탁월한 웅변술로 페드로브루파(Petrobrusians) 같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그는 각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책임을 져야 하며 성직자, 유아세례, 미사, 죽은 자를 위한 기도, 교회의 예식, 교회의 건물은 모두 불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참된 종교는 그런 물질적인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또 십자가에 대한 어떠한 존경도 거부했으며 십자가는 고문의 도구로서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는 설교를 실천하기 위해 님므 부근의 순례 도시 생질르에서 십자가를 불태웠는데 그때 격노한 구경꾼들이 그를 불 속에 던져 버렸다.1)
피에르는 특별히 신부들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수도사들에게 결혼을 촉구했다. 그는 자주 정죄되었는데, 예를 들면 1139년 제2라터란 공회에서였다.2) 피에르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성직을 반대하면서 그 사제직과 연관된 모든 의식과 십자가와 건물까지도 반대한 근래의 무교회주의자와 같았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반대는 성직자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서도 결코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2. 앙리 드 로잔 Henry of Lausanne, d. 1145년 후

로잔의 앙리는 원래 베네딕트회 수도사였다. 1116년경부터 프랑스 북부와 남부 지방에서 순회 설교자가 되어 1145년까지 활동했다. 그는 1116년 르망에서 사순절 설교를 했는데 탐욕스럽고 불순한 성직자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 소요가 발생했다. 그는 주인에게 추방되었으며 포아티에와 보르도에서 설교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아들의 대주교에게 체포되어 1135년 피사공의회에서 교황 이노센트 2세 앞에 서게 되었다. 그때 그의 몇 개의 신조들이 정죄되었고 순회 설교를 중단하고 수도원으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수도원에서 탈출하여 다시 툴루즈 근방에서 승낙 없이 설교를 재개했다.
그는 유아세례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거부했다. 그는 십자가를 존중했으나 원죄 교리를 부인했으며 합당치 못한 사제들이 행하는 성례의 효력을 부인했다. 그는 구원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강조했으며, 참된 교회는 신실한 자들이 가난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권고해 줄 가난한 순회설교자만 있으면 족하다고 했다.3)

교회의 반응
1135년 그는 체포되어 피사 공의회는 그의 사상을 철회하도록 명령했으나 반 성직적인 설교를 다시 시작했으며 성 버나드(Beranard)에게 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는 1145년경 다시 체포되었으며 곧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4)

3.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Marsilius of Padua, 1270-1342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는 1324년 저술한 「평화의 수호자」(Defensor Pacis)에서 교회와 국가 모두의 원초적 관계를 정의하고 양자간의 평화를 강조했다.

마르실리우스의 사상
마르실리우스는 교황의 권위와 무오설 및 현세적 권위를 부인했다. 그는 오직 정경의 성경만이 무오하며 신앙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했다. 또 절대적 권위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대변자로 세우신 목사와 평신도 대표로 구성되는 총회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위대한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며, 또한 그의 권위를 로마 교회에 이양해 주지도 않았다.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더욱이 그가 로마의 감독이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감독과 장로들은 근본적으로 동등하며 회중에 의해 피선된 자들이다. 목회적으로 복음을 설교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경고하고 성찬을 주재하는 것이 목사의 유일한 기능이다. 성직자들은 교회에서 심판적 권위의 활용자가 아니라 중재자로 존재한다.5) 교황과 주교 직분은 모두 인간적 기원을 가지므로 사제에 의한 파면에는 권위가 있을 수 없다.
마르실리우스는 파두아에서 공부한 후 파리로 가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북이탈리아와 아비뇽에서 의사로 개업하면서 1320년부터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324년 그는 「평화의 수호자」를 완성했으며, 1326년 그가 그 책의 저자임이 알려져 출교당하게 되자 바바리아의 루이스(Louis) 황제에게 피신했다. 1327년 요한 22세는 마르실리우스의 책에 대해 다섯 가지의 명제들을 정죄하고 저자를 출교시켰다.
1327년에서 1329년, 그는 루이스 황제와 함께 로마로 갔으며, 거기서 제국의 신부가 되었다. 루이스 황제의 정책이 실패한 후에는 뮤니히(Munich) 궁에서 살았다.
그의 저서 「평화의 수호자」는 중세에 가장 도전적인 작품 중의 하나였다. 그는 국가가 사회의 가장 큰 통일된 권력이므로 교회도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가 영적이든 세속적이든 재판권을 상속하지 않았으며 모든 권위는 국가에 의해 부여받는다고 보았다. 교회는 자신의 부동산이 없으며 국가가 교회에 빌려 준 것을 사용할 뿐이라고 했다. 또한 계급적 성직제는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의 제도라고 했다.

요약과 평가
이상의 세 사람들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제를 비판하고 반대했다. 그 중에 피에르 드 브뤼이의 피터는 가견적인 교회를 거부하고 반 십자가적인 사상을 지닌 점에서 이단이었다. 그러나 로잔의 앙리의 경우는 종교개혁자의 사상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르실리우스의 경우는 더 급진적인 개혁 사상을 지녔다. 이와 같은 반 가톨릭 교회와 그 성직제에 대한 비판은 교회가 부를 축적하는 재산가가 되고 교황과 성직자들이 국가 이상으로 제한 없는 재판의 권위를 행사하며 신앙과 생활에서 본을 보이지 못한 신부들에 대한 반동이었다.
이렇게 반 성직적인 개혁 사상을 가진 이들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의 선구자였고 나아가서 민주주의와 심지어는 전체주의의 선구자 역할을 동시에 했을 것이다.6)

<주>
1) 브라이언 타이어니/시드니 페인터, 서양중세사, 이연규 역 (질문과 답 1993), 364; 서요한, 중세교회사, 370.
2) “Peter De Bruys”,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1071.
3) 서요한, 중세교회사, 371.
4) “Henry of Lausanne”,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636.
5) J. Derec Holmes/ Bernard W. Bickere, A Short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London: Burns & Oates, 2002), 104-105; 서요한, 중세교회사, 372.
6) “Marsiglio of Pauda”,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