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복음적 이단
1. 왈도파 The Waldoneses
왈도파는 12세기의 마지막 25년 간 개신교적 청교도 개혁 운동을 했다. 창시자 왈도(Peter Waldo, 1140-1217)는 리용의 부유한 상인이었다. 1173년경 그는 신약 번역 성경을 읽고 주님의 요구에 크게 감명을 받아 아내와 딸들이 살 만큼의 재산만을 남기고는 나머지 모두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1) 그는 ‘영의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란 그룹을 만들었다. 1177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모두가 평신도들이었지만 설교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주로 성경을 의지하고 사도 시대의 단순한 가르침을 지키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함에 있어 청빈을 강조했다. 이들은 옷차림이 소박하고, 손으로 노동하며, 순결을 지키고, 먹고 마심에서 절제하고, 술과 춤을 삼가며, 부의 축적을 악으로 보았다. 이들은 여성과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고,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와 기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으며, 연옥은 지상에서 우리의 삶을 괴롭힌다고 보았다. 그리고 라틴어로 기도하는 것을 비판했으며, 법정에서 맹세를 금했고, 평신도도 성찬을 집례할 수 있다고 했다.2) 마침내 이들은 1179년 제3차 라테란 회의(Third Lateran Council)에 설교를 허가해 줄 것을 청원했다. 공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무식한 평신도로 생각했으며,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Ⅲ, 1159-1181)는 그 요구를 거절했다. 그 결정이 그들로 하여금 단호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왈도는 사람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교회의 결정을 거부했다. 그 결과 1184년 교황 루시우스 3세(Lucius, 1181-1185)에 의해 파문당하고 말았다. 이런 파문은 왈도파를 교회에서 몰아내는 결과가 되었다. 겸손한 무리의 집단이었던 휴밀리아티(Humiliati) 종단은3) 밀란에서 고행의 공동생활을 했다. 이들 역시 알렉산더 3세에 의해 분리된 모임과 설교가 금지되었고 불순종을 이유로 1184년에 제명되었다. 이들 중에 롬바드의 휴밀리아티들의 상당수가 왈도파에 연합하게 되었다.
왈도파의 관행
이들에게 성경은 가장 중요한 원리로서 신약이 믿음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이었다. 신약은 그들에게 율법의 책이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따랐으며 많은 부분을 마음으로 깨달았다. 이들은 성경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나가 둘씩 짝지어 설교했고, 양털로 된 단순한 옷을 입었으며, 맨발이나 샌들을 신고 온전히 그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선물로 생활하면서 월요일과 수요일 그리고 금요일은 금식을 했다. 이들은 맹세를 배척했으며 모든 종류의 피흘림을 금했고, 식탁 앞에서 은혜를 감사하는 것도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로만 했다. 이들은 죄의 고백(신앙)을 듣고 주의 성찬을 행했으며 사역가로 그들의 회원에게 안수했다. 미사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 그리고 연옥을 비성경적인 것으로 부인했다. 성례가 자격이 없는 사제에 의해 집례가 되었다면 무효라고 보았다. 기도는 교회에서 하는 것보다 은밀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역시 남녀 평신도에 의한 설교를 변호했다. 왈도파에도 감독들, 사제들 그리고 집사들이 있었으나 그 공동체의 머리는 목사였다. 이들의 머리는 왈도 자신이었고 그가 죽자 후계자는 선거에 의해 지명되었다.4) 이들은 모국어로 설교를 했으며 성경의 모국어 번역에 힘썼다. 이에 대해 로마 교회는 1229년 툴루스(Toulouse) 회의에서 평신도가 성경의 자국어 번역을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시켰다. 그리고 종교 재판소의 이용과 이단자 처벌로 대처했다. 1217년 왈도가 죽자 비밀리에 그를 도왔던 많은 친구들은 로마 교회 안에 머물면서 개혁자의 역할을 했다. 왈도파는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와 독일에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으며 극심한 박해 중에는 접근이 힘든 높은 산 계곡에서 생존했다. 1532년에는 제네바의 개혁자들과 시설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재까지 문서로 기록된 유일한 중세의 분파다.5)
요약과 평가
왈도파는 개혁의 선구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로마 교회도 인식했듯이 이단은 아니었다. 다만 교회의 권위에 불복종한다는 것이 문제였으며, 로마 교회가 수용할 수 없는 개혁적인 관행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그런 분파가 이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왈도파는 개혁자들에게 성경의 권위, 모국어 설교와 성경의 번역 그리고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평신도 운동이었다.
2.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 1320-1384
위클리프는 요크셔(Yorkshire)의 힙스웰(Hipswell)에서 태어났다. 그때는 영국의 의회가 로마 교황이 성직자 재판을 하는 것과 영국 내 성직자를 교황이 임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존 위클리프에 의해 1,000마르크의 교황세를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옥스퍼드의 밸리올(Balliol) 대학에 입학하여 짧은 시간에 석사가 되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큰 클래스에서 강의하는 특별한 학자로서 교수 중에서 능력 있는 신학자가 되었다.6) 그는 철학적으로 실재론자(realist)였으며 어거스틴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374년에는 왕의 신학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또 왕에 의해 워터워스(Walterworth)의 교구장이 되기도 하고 왕의 정치 사절로 대륙에 파송되기도 했다. 처음에 그가 로마 교회를 반대한 것은 교리적인 것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는 영국인으로 프랑스 왕의 수하에 있는 아비뇽(Avignon)의 교황에게 세금 내는 것을 싫어했다.
위클리프의 사상
위클리프는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처럼 당시의 잘못된 신앙과 신학자들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전능한 자유의지와 주권을 강조했다. 그는 1376년 「시민의 주권」(Of Civil Dominion)에서 교회의 재산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바로 사용하지 못할 경우 관리가 재산을 빼앗아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게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1382년에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로마 교회의 교리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시다. 교회의 권위는 로마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다. 교회의 모형은 신약성경을 따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국어로 성경이 번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는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고, 그 결과 영국에서는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382년에는 화체설을 부인했으며, 고해성사는 인정하지만 직접 고백이 더 효과적이라고 했다. 성자나 유물 숭배는 잘못이며, 성지순례는 공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예배는 의식보다 신령과 진리로 드려야 하며, 크리스천의 소명은 성직이 아니라 성품의 성결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상은 헌신을 증진시킨다는 이유로 옮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자에게 하는 기도는 잘못된 것이며, 죄의 고백이 유익하려면 자발적이어야 하며 적합한 사람에게 해야 하고 최선의 죄의 고백은 공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옥스퍼드가 주교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교회를 공격하는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은 쫓겨나게 되었다. 옥스퍼드가 위클리프의 적대자들의 손에 들어가자 위클리프는 러터워스(Lutterworth)로 은퇴한 뒤 그 고장을 활동 중심지로 삼았다. 그는 가난한 설교자들로 불리는 사람들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방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교했으며 복음서와 서신들을 읽고 십계명과 다른 신앙의 기초들을 가르쳤다.7) 그의 로마 가톨릭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오로지 성경이었다. 그것은 어거스틴이나 제롬의 증언도 아니며 받아들여야 할 어떤 성자의 증거도 아니며 오로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법은 최선이며 충분하다. 다른 법들은 취해서는 안 되며 다만 하나님의 법의 가지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에 대해 신약은 완전한 권위가 있으며 구원에 가장 필요한 요점으로 농부도 이해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고 했다. 또 그리스도는 그의 법을 책상에서 쓰시지 않고 동물의 가죽에도 쓰시지 않았으며 사람의 마음에 쓰셨다고도 했다.8) 그는 성경의 사람이었다. 그는 1384년 그의 집에서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다. 그것은 귀족들이 그를 지켜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황의 법령은 그를 반대했었고 1382년에는 런던의 한 회의에서 그를 정죄했으며, 콘스탄스 회의(The Council of Constance)는 그를 267개의 죄목으로 정죄했다. 그 회의 결과 그의 뼈를 파내서 불에 태워 강에 뿌리게 했다(1428).
요약과 평가
위클리프의 투쟁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는 영국에 종교개혁의 길을 예비했으며 모국어 성경을 안겨 주었다. 그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담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전통이나 그밖의 어떤 자료를 통해 더 이상의 가르침을 보충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교회의 전통, 교회법, 공의회, 교황 같은 기타의 모든 권위들은 성경에 의해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9) 성경이 다른 모든 가르침을 테스트하는 데 유일한 기준임을 확실히 했다. 그는 평신도 전도자를 통해서 복음주의 사상을 전했으며 교회 안에 평등을 가르쳤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높였고 평신도에게 성경을 읽게 했으며, 화체설과 독신주의를 모두 반대했다.10) 영국에 와서 공부한 보헤미안 학생들이 그의 사상을 지니고 본국으로 돌아가 전했으며, 그의 사상은 존 후스(John Huss)의 사상과 가르침의 기초가 되었다. 과연 그는 종교개혁의 새벽별이었다.
3. 존 후스 John Huss, 1369-1415
14세기 후반에 보헤미아에서는 성직자들 중에 다수가 부패하고 세속에 물들어 있었다. 따라서 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지도자가 존 후스였다. 그는 평민 가정의 출신으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고 교육받았다. 그는 프라하 대학에서 문학사(1394)와 예술로 석사 학위(1396)를 받았다. 그는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으나 성실했다. 그는 1400년 신부로 안수받았고 1402년 베들레헴의 거룩한 자들 교회(the Chapel of the Holy Innocents of Bethlehem)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역시 같은 해에 그는 보헤미아 대학교에서 예능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는데 피터 롬바드(Peter the Lombard)의 조직신학을 강의했고, 나중에 프라하 대학 철학과 주임이 되었다가 마침내 그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반대자들로부터도 순결을 칭찬받을 정도로 깨끗한 생활을 했다.11) 영국의 왕 리차드 2세(Richard Ⅱ)가 보헤미아의 앤(Anne)과 결혼함으로써 두 나라가 연계되면서 많은 보헤미아 학생들이 영국의 옥스퍼드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 위클리프의 사상과 저서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보헤미아로 가지고 돌아갔다. 이미 1380년 초에 프라하에서 위클리프의 작품들이 읽혀지고 있었다. 따라서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후스도 위클리프의 사상을 접했을 것이다. 그는 거기서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영국의 개혁자들의 견해를 채택했고, 베들레헴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위클리프의 교훈을 확산시킬 수 있었다. 그는 라틴어와 체코 말로 설교했으나 주로 체코 말로 설교했으며, 이는 그의 설교가 일상의 그리스도인의 생활 만큼 그 목적이 직접적이지 않았을지라도 애국심을 자극했다. 그는 부패한 교구의 신부들을 교회의 악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기초는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많은 교황들은 이단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는 교회의 혁명이나 급진적인 신학적 사색보다 도덕적 개혁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12) 그의 설교에 대한 반응은 대단해서 왕비는 자기의 궁녀들을 데리고 후스의 설교를 들으려 왔으며 후스를 그녀의 고해 청취자로 삼기까지 했다.13) 심지어 벽에 교황들과 그리스도의 행위를 대조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교황은 말을 타고 그리스도는 맨발로 걷는 모습이었으며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데 교황은 자신의 발에 입맞춤을 받는 것이었다. 이런 반 교황적이고 부패한 사제와 교회에 대한 공격은 국내의 정치적 분열, 교황청의 대분열로 말미암은 충성심의 분열 및 보헤미아, 특히 프라하에 입주해 있던 독일 사람들에 대한 체코 사람들의 전통적인 중오 때문에 매우 복잡했다. 따라서 후스는 체코 사람들을 대표하는 투사로 여겨졌다. 점차 위클리프의 영향이 대학교를 지배하게 되자 이를 우려한 프라하의 대주교는 최초의 피사파 교황(The First Pizan Pope)으로부터 교황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위클리프의 모든 저서를 대주교에게 넘겨주어 불태움으로써 후스를 침묵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피사파의 교황 요한 23세에게 상소했으나 그 교황을 규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교황이 나폴리 왕(the King of Naples)을 정복할 십자가를 수집했고 이를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후스는 대학교 신학 교수진과 관계가 소원해졌고 요한 23세는 후스를 엄격하게 금문 조치했다. 후스는 프라하를 떠날 수밖에 없었으나 계속하여 이곳저곳에서 설교를 했다. 후스에게 교회는 예정된 자의 총수였다. 그는 교회 안의 신자와 교회의 신자 사이를 구분했으며 교회 안의 사람은 참된 교회원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우주적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교황과 감독들의 교회 통치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또한 속죄권의 판매는 성경적으로 위법이라고 배격했고 교황보다 교회의 회의가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다. 후스의 문제가 전 유럽에 중요성을 갖게 되자 콘스탄스 공회를 소집하게 되었고, 소집에 큰 부분을 책임졌던 시기스문드(Sigismund)는 보헤미아 왕의 형제로 후스로 하여금 공회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세우도록 독려했다. 여기에 응한 후스는 그에게서 안전 통행권을 받아 콘스탄트까지 여행했으나 거기서 관리에게 체포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그는 공회에 출석해 자신의 주장을 펴지도 못한 채 이미 각본대로 짜여진 재판에서 정죄되어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는 죽었으나 그의 사상은 지속되었다. 위클리프와 후스를 따랐던 사람들은 두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보다 급진적인 그의 추종자들은 타보르파(the Taboritos)로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는 로마 교회의 신앙과 관습의 모든 것을 배격했다. 이들은 눈이 먼 장군 재스카(Ziska)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다른 진영은 우트라크주의자(The Utraquists)로 알려졌는데 귀족적인 모임으로 평신도들에게 영성체와 빵과 잔을 모두 주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복음의 자유로운 전파와 도덕적인 성직자들을 원했다. 이들은 성경에서 금한다고 믿었던 가톨릭 교회회의 관습만을 반대했다.
요약과 평가
존 후스는 교회에서 위클리프보다 더 보수적이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 계급주의적 교회 대신 택자들의 불가시적 교회를 강조했다. 존 후스의 사상은 후대 기독교 역사상 교회에서 가장 선교적인 정신을 지녔던 모라비안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후스는 모라비안들이 웨슬리를 런던에서 빛으로 인도하였으므로 웨슬리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역시 후스의 교훈과 모범은 그의 시대에 독일에서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루터에게 영감을 주었다.14)
4.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alamo Savonarola, 1452-1498
사보나롤라는 페라라(Ferrara)의 파두아(Paduan)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고상한 성품을 소유한 분이었고, 할아버지는 신앙심이 깊은 의사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크게 헌신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에 심취했고, 페라라는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새 조류에 저항할 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연애에 실패한 그는 20대 초반에 볼로냐로 가서 도미니칸 승단에 들어가 금식과 기도를 하며 신입 수도승 후보들을 가르쳤다. 그 후 1481년엔 전쟁 때문에 페라라에서 플로렌스로 옮겼고, 거기서 개혁파 도니미칸 승단에 속한 성 마가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10년이 지나면서 그는 설교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며 회개를 촉구했다. 그리고 1493년 그는 성 마가 수도원 원장이 되었고 그 지역의 도미니칸 승단의 단장이 되었는데 직무 수행과 사생활에서 모범을 보였다. 1494년 말 플로렌스는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위기에 내몰렸고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메디치의 지도력이 약화되었는데, 사보나롤라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설교함으로써 플로렌스의 폭동과 무정부 상태를 극복했다. 메디치가 플로렌스에서 축출되고 프랑스가 플로렌스를 포기하게 되자 그는 참 예언자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메디치가 플로렌스를 떠난 후에 그곳을 공화국으로 건설하는 데 기여했다. 사보나롤라는 플로렌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실 것을 간청했으며 이탈리아, 플로렌스, 군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에게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또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 외에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간청했다.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그 도시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와서 여인들은 화려한 옷을 버리고 검소한 옷차림을 했으며, 은행가들과 상인들은 사악하게 취한 이윤을 되돌려 주었고, 성경과 사보나롤라의 작품들이 널리 읽혔다. 교회가 가득 차고, 빈가에 대한 구호 활동이 늘었으며, 중요한 가문의 자제들이 수도사로 성 마르코 수도원에 들어왔다.15) 1496년에는 그의 개인적인 설득으로 난장판의 축제였던 축제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어린이들이 찬송하며 거리를 행진하는 계기로 변화시켰다. 이에 대해 반대파에서는 교황에게 어떤 조치를 취해 주기를 청원했고, 교황 알렉산더 6세는 1495년 그를 정중히 교황청으로 초청했다. 교황은 그에게 설교를 하지 말 것과 그 대가로 추기경 자리를 제의했다. 그러나 그는 거부했다. 그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보다 순교자의 붉은 피를 원했다. 교황은 그가 세례 요한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했다. 1497년 교황은 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16)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교황의 파문 교서나 설교 금지, 그리고 산 마르코 수도원을 도미니크 수도원들의 모임에 넣어 지배하려는 모든 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교황은 플로렌스에 금제령을 내려 위협하면서 시관리들에게 그 탁발 수도사를 함구시키던가 그를 재판받게 할 로마로 보낼 것을 명령했다. 사보나롤라는 프랑스, 스페인, 영국, 헝가리와 독일의 왕들에게 청원하여 교회의 공회 소집을 요청하면서 알렉산더 6세는 참된 교황도 목자도 그리스도인도 아니라고 했다. 한 프란시스칸 구걸승은 사보나롤라를 이단자, 거짓 예언자, 분리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불에 손을 넣어 무죄를 증명하라는 옛 재판 관습을 제시했다. 사보나롤라가 이에 응하자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기 위해 모였는데 소나기와 진행상의 문제로 재판이 연기되자 프란시스칸 사람들은 도망을 쳤고 실망한 군중들은 사보나롤라와 도미니칸 종단을 대적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사보나롤라의 반대자들이 도시 정부를 차지하게 되면서 사보나롤라를 체포하여 그와 그의 제자 두 명을 중세의 고문 방법으로 재판했다. 이 재판은 탁발 수도사가 죽는 것을 목격하려는 교황의 명을 받은 두 명의 교황청 관리들 앞에서 계속되었다. 1498년 5월 3일 사보나롤라와 두 명의 그의 제자는 유죄 평결을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들의 시체를 대광장에서 불태웠다. 사보나롤라가 이단자가 된 것은 그의 교리와 신앙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선지자적인 설교자였고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은 성직자의 사치와 세속화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질타로 이어지게 되었고 교회의 머리였던 교황에게까지 책임을 묻게 되었다. 이에 교황은 그를 침묵시키려 압력과 유화책을 썼으나 그가 이에 불응하면서 그의 개혁은 반대 세력이 교황의 뜻을 따름으로써 희생되고 말았다. 그는 그의 시대가 일반적으로 동의했던 로마 가톨릭 교리를 모두 다 받아들였다. 교황의 권위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개신교와의 관계는 형식적인 신앙에 있기보다는 영적인 것이었으며, 특별히 성경에 대한 그의 애정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직접 호소하는 그의 성향에 있었다.17) 그는 인간의 부패와 무능을 절감했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었다. 그는 의의 설교자였으며 선지자들과 교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에스겔과 이사야, 나단과 세례 요한의 계열에 속하며 개신교 세계의 친구로는 요한 낙스가 있었다.18)
요약과 평가
사보나롤라는 종교개혁의 진정한 예언자였고 위대한 정의의 설교자로 대담하게 죄악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런 정의감에 찬 공격적인 설교는 교황과 사치와 세속에 물든 성직자들의 반대와 미움을 사게 됨으로써 개혁을 이루지 못한 채 순교했다. 그러나 역사는, 심지어 후대의 가톨릭 교회까지도 그에 대한 정죄가 잘못임을 밝혀 주었다. 그의 처형 400주년인 19세기 후반에 세계 모든 곳에서 가톨릭, 특별히 도미니칸은 그의 기억과 노력을 변호했으며, 알렉산더 교황이 사보나롤라에게 파문을 선고했지만, 그는 파문당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했다. 가톨릭의 사가들은 그의 죽음을 재판소의 살인이라고 했다.
5. 오캄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c. 1285-1347)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이며 철학자였다. 그는 영국의 서리(Surrey)에서 출생해서 1310년경 프랜시스파 수도원에 들어갔고, 1318년과 1324년 사이 옥스퍼드에서 배웠다. 그는 그의 사상 때문에 아비뇽(1324)에 소환되어 이단에 대한 혐의에 답변해야 했다. 교황 요한 22세와 영적 프랜시스파 사이에 논쟁이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윌리엄은 교황 요한에 반대하여 신령파(the Spirituals)와 입장을 같이 했다. 1328년 그는 그 도시를 떠나 바바리아의 루이스(Louis of Bavaria) 황제의 궁으로 갔다. 출교된 윌리엄은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이 당신의 칼로 나를 방어해 주신다면 저는 제 펜으로 당신을 변호하겠습니다.” 그는 1328년부터 죽을 때까지 교황을 선호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제국 원리에 대한 능력 있는 변호를 했다. 1347년 황제 루이스 사후에 그는 그의 종단과 교회와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윌리엄의 사상
윌리엄은 유명론자(Nominalist)로서 실재론(Realism)을 반대했다. 그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개별적인 사물들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사물들은 그가 명명한 이른바 직관(intuition)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개체와 개인을 단체나 집단보다 중시했다. 그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채택한 논리와 이성을 통해서는 결코 기독교의 신조들을 증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게 기독교의 교리들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유쾌한 논리의 방법으로 도달한 진리와 복음을 통해 알게 된 진리 사이에는 이성이 가교할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고 했다.19) 그는 교황적 권위를 제한하고 지상적 군주의 권위를 증대했다. 교회의 최고의 권위는 교황이 아니라 종교회의이며, 교황에게는 세속적인 권위가 없고, 황제가 교황을 폐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과 보편 교회만이 오류를 범할 수 없으므로 교황은 이 권위에 자신을 굴복시켜야 하며, 세계는 교권에서 해방되어 왕권에 속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교황은 신의 하인들의 하인이어야 할 터인데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공격했다.20)
요약과 평가
윌리엄은 교황의 권위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 스콜라 철학(신학)의 실재론에 반대하여 유명론을 주장함으로써 보편 대신에 개체와 개인의 독립을 외쳤고, 로마 교회의 신학과 교권에서의 자유를 주창했다. 그는 황제의 권위와 국가를 교황과 교회 위로 높임으로써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것은 그 당시로서는 당연했으며 후대에 국가가 교회를 통제할 수 있는 원리를 제공해 준 셈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원리는 로마 가톨릭에서 유럽의 몇몇 국가들이 개신교로 그 신앙을 선회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르친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어거스틴파가 믿었던 조명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다만 믿음으로써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실제로 종교개혁자들에게 개혁을 위한 사상적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존 위클리프와 루터에게 큰 감화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주> 1) 마태복음 19:21-26. 왈도는 주님이 사도들에게 하신 지시를 그대로 따르려 했다. 2) 이형기, 세계 교회사(1)(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5), 517-518. 3) 12세기 Johannes Oldratus(d. 1159)에 의해 세워진 중세 수도원의 한 종단. 베네딕트의 규범을 따랐으며, 가난한 자와 병자들을 돌보며 몸의 고행을 실천했다. 4)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Christian Church(New York: Charles Scribner’s, 1970), 230. 5) Everett Ferguson, Church History, Vol.1(Grand Rapids: Zondervan, 2005), 505. 6) 그는 옥스퍼드에서 어거스틴주의 신학자요 후에 켄터베리 대주교가 된 브레드워다인(Bradwardine)에게서 배웠다. 7) James North, A History of the Church(Joplin: College Press, 1997), 285-286. 위클리프가 파송한 설교자들은 가난한 사제들, 진짜 사제들 혹은 방랑하는 설교자들로 불렸다. 8) Bruce L. Shelley, Church History in Plain Language(Waco: Word, 1982), 246. 9) 존 우드브리지, 인물로 본 기독교회사, 상권, 박용규 역(서울: 선교횃불, 2003), 283. 10) E. S. 모이어, 인물중심의 교회사, 곽일권, 심재원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1), 273. 11) 이형기, 세계 교회사(1), 700-701. 12) James North, op.cit., 287-288. 13) 케니스 래토레트, 기독교사(중), 윤두혁 역, 274-275. 14) 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Grand Rapids: Zondervan, 1981), 253. 15) 케니스 래토레트, 기독교사(중), 윤두혁 역, 281-282. 16) Henry C. Sheldon,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477. 17) Ibid., 479. 18) Philip S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Ⅵ(Grand Rapids: Eerdmans, 1974), 712. 19) 케니스 래토레트, 기독교사(중), 윤두혁 역, 54-55. 20) 서요한, 중세교회사, 373-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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