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배경
반 삼위일체의 견해는 덴크(Denk), 헷져(Hetzer), 멜카이어 호프만(Melchior Hofmann)과 같은 재세례파의 인물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에 영향을 받은 급진적인 인물로는 그리발디(Matteo Gribaldi, 1564) 와 겐티레(Giovonni Valentino Gentile, 1520-1566)가 있었다.
겐티레는 1557년 제네바로 왔다가 거기서 그의 견해 때문에 형벌을 받게 되자 그곳을 피해 방랑하다가 1566년 베른(Bern)에서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좀 더 중요한 인물은 베온드라타(Giorgio Biondrata, 1515-1588)였는데 그는 1년간 제네바에서 머물다가 1558년 폴란드로 갔고, 거기서 트랜실바니아(Transylvania) 통치자의 주치의가 되었다.7)
2) 중요한 인물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은 미카엘 셀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였다. 그는 초기 반 삼위일체 사상가들 중에서 칼빈의 제네바 치리 때 화형을 당함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는 그의 저서《그리스도교 회복》(Restitutio Christianismi, 이 책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대한 답변이었다)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고 아들의 영원성을 부인했다. 그는 유아 세례를 배격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반감을 모두 사게 되었다. 그는 가톨릭의 이단 재판은 피했으나 제네바를 여행하는 동안에 체포되었고, 칼빈의 동의에 의해 1553년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당했다.8)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의 반론에 대한 교리적 근거와 그 체계를 세운 중요한 인물은 소시너스(Lelio Socinus, 1525~1562)였다. 그는 유명한 시에네스 가문에서 출생하여 법률을 공부했으며, 처음에 그의 견해는 복음적이었다. 그는 1550 -1551년 비텐베르크(Wittenberg)에 살면서 멜란히톤(Melanchthon)과 친분을 가졌다. 그는 스위스의 다른 도시 제네바에서는 환영을 받았고 쥬리히에 정착했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의 관심은 삼위일체였으나 공적으로 그것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의 사상을 체계화시킨 인물은 그의 조카 파우스토(Fausto Sozzini, 1539-1604)였는데 그는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그는 1561년 노용에서 1562년 제네바로 갔고 1563년에서 1575년까지는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공적인 활동을 했다. 거기서 다시 바젤로 갔고, 1578년 트랜실바니아로 갈 때까지 체류했다가 1579년에는 폴란드로 가 거기서 1604년 세상을 떠났다.
폴란드에서 파우스토 소시너스(Fausto Socinus)는 다른 학자들과 함께 중요한 거점을 확보했고, 1605년 「라코비안 교리문답」(Racovian Catechism)을 출판했다. 그것은 라코우(Rakow)라는 도시에서 온 이름으로, 바로 그곳이 이 폴란드 형제파의 본부였다. 이렇게 소시너스주의는 폴란드에서 급속하게 발전했다.
파우스토 소시너스는 〈De Jesu Christo Salvatore〉라는 논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노를 진정시킨 것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의 길을 알리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고 우리가 그를 모방함으로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하셨다”고 했다.9)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파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싸웠듯이, 칼빈은 반 삼위일체론자들과 투쟁했다. 칼빈은 폴란드의 종교개혁의 진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몇 편의 서신을 왕과 황제 라지빌(Radziwill) 그리고 몇 사람의 폴란드 귀족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의 저서와 반 삼위일체 사상이 그 나라에 확산되자, 칼빈은 그 이단의 위험성에 대해 그의 저서에서 폴란드 형제들을 경고했다.10)
3) 소시너스주의의 신학
소시너스파의 교리적 표현인 라코비안 교리문답은 합리주의적 이성과 초자연주의의 조화를 시도한 것이었으며, 18세기 자연 신론과 유사한 것이었다.
(1) 성경관
소시너스파는 신적 계시의 원천으로 성경의 권위에 집착했고 전통을 배격했다. 성경은 영생으로 가는 길에 대한 신적 계시였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를 포함할 뿐이지 그 자체가 계시는 아니었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발견될지라도 고유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었다. 구약은 단지 역사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가치나 중요성이 없었다. 구약 시대에는 영생의 약속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처음으로 전달된 것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였다.11) 파우스토는 구약과 신약의 거룩한 저자들은 종교적 진리의 내용에 관하여만 영감되었을 뿐 제2차적인 문제들은 사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의 교리문답은 성경의 영감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 성경 저자들은 어떤 무오한 초자연적 지도를 받지 않았다. 다만 주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성실하게 그것을 보고하고 그들의 설교에서 그것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확실하게 이성을 따르지 못했으며 그들의 교훈을 강조하다가 사도 바울을 대적하기도 했다.12) 다만 역사가로서 사도들이 쓴 성경에 대한 믿음과 확실성을 주장할 뿐이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성과 도덕적 중요성 그리고 유용성에 따라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구약은 영감에 의한 것일지라도 실제적으로는 역사적인 가치가 있을 뿐 전혀 교리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신약은 기독교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나, 그것은 새로운 신적인 교리에 한해서일 뿐이다.13) 이들은 계시를 합리적 검토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약에서는 이성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으나 이성과 모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합리성이 성경에 있는 진리의 특별한 표준이 되었다.14) 결국 이성이 성경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소시니안은 성경책의 영감을 논박했으며, 이성과 모순되는 어려운 것은 피하고 이성에 일치하는 것만을 가르쳤다. 성경의 진리를 선별적으로 구별하여 믿고 가르쳤으며, 이런 경향은 그 근저에 이성의 판단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삼위일체론
하나님의 교리에 있어서 소시너스주의는 하나님의 단일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라코비안 교리문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만이 이스라엘의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교회들의 교리문답서”라고 되어 있다.15) 그리고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지식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삼위일체 교리가 그들의 이성에 모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우스토는 한 신적 본질 안에 인격의 복수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다. 그는 편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는 하늘에 계시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전능하시지도 않다. 그의 예지는 필연에 제한될 뿐 아니라 가능성에도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스러운 행동을 예지하신다면 인간의 자유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예정이 거부되었다.
하나님이 불가사의한 분이시므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이적적으로 잉태되신 한 인간이었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나, 그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시지 않았다. 그는 입양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스승으로서 그의 직무에 들어오시기 전, 그는 바울과 같이 얼마 동안 하늘로 올리워 가셨다(요 3:13, 31; 6:38, 62). 거기서 그는 그의 교훈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실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대속적인 속죄의 의미가 없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단지 그의 교훈의 진리에 대하여 증거할 뿐이다. 그 교리문답은 신약이 신성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고 가르친다. 부활 후에 하나님은 제2의 의미(Viceroy)로서 그에게 신적 능력을 위임하심으로써 그의 순종에 보상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예배의 대상이 되실 수 있다. 승천 후에만 그리스도는 불멸의 몸을 가지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소시너스파의 기독론은 그 본질에서 제3세기 사모스타의 바울이 가르친 역동적 군주신론의 부활이었다. 그리스도는 인성에서 신성으로 몰입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이다.16) 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뿐이라는 소시너스주의는 초대 유대적인 이단 종파였던 에비온파와 연관이 있고 역시 영지주의의 한 파와도 유사했다.17)
이들은 성령에 대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에게로 흘러나오는 덕성이나 힘이라고 정의했다.18) 성령의 인격을 부인하고 신성을 부인한 것이다.
이들은 성경에 대해 이성적 해석과 판단을 주저없이 시도하면서도 어떤 구절에서는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문자에 집착함으로써 일관성을 결여하고 말았다.
(3) 구원론
소시너스파는 무에서의 창조를 부인한다. 하나님은 선재하는 물질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가사적(可死的)으로 창조되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지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인간의 지배를 가리킨다. 인간의 도덕적인 의는 무시되었으므로 아담은 확실한 의나 거룩이 없었고 죄의 결과로 그것들을 잃을 수도 없었다. 비록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초래하긴 했지만 그의 도덕적 품성은 잃지 않았으며 그의 죄가 후손에게 전가되지도 않았다.19)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함으로써 신앙을 얻는다. 말하자면 그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름으로 영생을 얻는다. 본성의 전적 부패는 없다. 인간의 죄는 단지 아담의 죄의 모방일 뿐이며 그리스도의 모방과 덕의 선택이 구원이다.20)
이렇게 소시너스파의 구원관은 본질적으로 펠라기우스적이다. 원죄가 부인됐으므로21) 아담의 타락은 마음과 의지에 아무런 부패의 결과를 남겨 놓지 않았다. 구원은 인간 자력에 의한 하나님의 계명의 순종에 있었다. 선행 추구가 칭의의 요인이 되었다.22)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만 그의 교훈에 대한 인(seal)으로 본 사상과 일치한다. 이들이 전통적인 구원관에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인간이 거기서 구원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선하심과 양립할 수 없다. ② 만일 사람이 공의의 만족이 없이도 용서될 수 있다면 왜 하나님은 그렇게 용서하실 수 없으시겠는가? 이 논증은 하나님이 절대타자(the wholly other)이신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③ 이 파의 중요한 반대는 도덕적 죄과는 전가될 수 없으며 공의의 만족은 범죄자 자신으로서만 치러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23) 원죄의 부인과 인간의 선에 대한 지나친 신뢰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이해 부족은 자연히 자력 구원 사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는 제한된 이성으로서는 완전히 이해될 수가 없었다.
(4) 성례관
성례는 본질적으로 은혜의 수단이나 방편이 아니라고 한다. 성례는 기독교의 초기에 유대교나 이교의 개종자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었다고 한다. 유익하기는 한 것이며 침례가 원칙이었다. 세례는 외적 언약의 표일 뿐이므로 지시되지 않았고, 유아들을 위해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가 죄는 아니나 의미는 없다. 다만 유아세례가 시행되는 것은 옛 전통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의 사랑에서 유아에게는 약식 세례가 허용되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었으며 떡을 떼는 상징적 의미에 강조점을 주었다. 세례와 성찬은 단순히 관습이나 의식일 뿐이다.24) 그럼에도 성찬은 기념이며, 고백의 행위이고, 더 나아가 도덕적 증진을 위한 방편이었다. 결국 소시너스파에게 성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드로전서 3장 21절,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로마서 4장 11절, 마태복음 28장 19절 등에서 성례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자에게 성령의 역사로 구원의 효과적인 방편이 된다고 가르친다.25)
(5) 권징
소시너스파는 권징에 상당히 엄격했다. 이는 그들이 기독교를 교리와 무관한 삶으로 보고 윤리와 도덕을 강조한 것과 일치한다. 그들은 어거스틴파의 원리를 따랐다. 교회 권징은 그 죄가 사적일 때는 사적이어야 하고 공적일 때는 공적이어야 했다. 공적이어도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 아닐 경우는 가벼운 처벌을 했는데 가장 엄격한 형벌은 공식적인 파문이었다. 이들은 교회 권징에 대한 문제에서 정부의 간섭을 배제했으나 모든 경우에 정부에 충실했다. 또 사적인 불만으로 보상을 받기 위해 시민법에 호소하는 것과 무기의 사용을 억제시켰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서 유연성을 지녔다. 이 점에서 소시너스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 본을 보이고 있는데 오늘날의 이단 종파에서는 보기 드문 관용적인 태도라고 하겠다.
(6) 종말론
소시너스파는 불신앙에 대한 영원한 심판은 멸절로 이해했다. 그러나 신자는 비록 불멸의 영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살아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불멸하게 된다고 했다.26) 이들의 멸절 사상은 근래의 여호와의 증인의 불신자에 대한 멸절의 교리와 유사한데, 이는 모두 성경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석한 결과였을 것이다.
(7) 종교관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만이 계시를 소유했기 때문에 종교를 가질 수 있었다. 종교는 구원의 교리에 대한 지식으로 성립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 교리를 주장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구원관은 은혜 구원 대신 행위 구원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성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이 기독교의 진리이고 도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만이 종교라고 했다.27) 이렇게 이성과 도덕을 중시하다 보니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자연적인 도덕과 윤리의 종교가 되고 말았다.
요약과 평가
소시너스파는 근대의 자연신론의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성이 이들의 성경을 판단하는 기준이었으므로 원죄, 그리스도의 신성, 삼위일체, 예정 그리고 구원관과 종교관에서 모두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재해석을 시도했다. 따라서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를 말하지만 그 의미는 달랐다. 로마 가톨릭이 성경의 자리에 교회의 전통을 두었다면, 소시너스파는 그 자리에 이성을 두는 오류를 범했다. 소시너스파는 무엇보다도 창조와 타락은 성경과 달리 해석했으며 그 결과 인간의 구원도 그 방법에서 믿음보다는 자력을 강조했다. 이들의 구원관은 행위 구원이었으며 이성주의로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인간의 선과 도덕을 강조한 현대 유니테리안파의 조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