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테리안 보편주의(Unitarian Universalism)
오늘날 세계에는 1,000여개의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의 교회들이 있으며, 등록교인은 21만 명인데 대부분이 미국에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50만 명의 미국인들이 자신들을 유니테리안 그룹의 일원으로 생각한다. 유니테리안 보편주의는 해마다 4%씩 성장하고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종교적인 권리의 진전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유니테리안파의 성격이 보편적이고 만인구원설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종교 다원주의사상과 어울린다. 저들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를 선호한다. 또 그들의 특성은 관용이기 때문에 부도덕한 생활 방식까지도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므로 그 다름을 인정해 주고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유니테리안 보편주의에 대해 곰스(Alan Gomes)는 동성애, 급진적인 여권 신장 그리고 낙태 등이 최상의 미덕이며, 양심과 경험이 진리에 이르는 궁극적인 안내자이고, 성경은 하나의 신화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영감을 주는 많은 스승 중의 한 분이라는 것 등이 유니테리안 보편주의자들의 교의를 운좋게 성장시켰다고 보았다.
미국의 유니테리안 보편주의는 많은 유명 인사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는데 미국의 다섯 명의 대통령(존 아담스, 토마스 제퍼슨, 존 퀸시 아담스, 밀러드 필모어, 윌리엄 태프트)과 유명한 문학가들, 예컨대 롱펠로, 에머슨,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찰스 디킨스, 그리고 여덟 명의 미국 대법관과 유명한 여성 나이팅게일과 안토니가 그들이다. 그밖에 여러 부류의 다른 유명한 인사들로는 찰스 다윈, 그레이엄 벨 그리고 폴 리비어가 있다. 미국 영예의 전당에 오른 명단 중 25% 정도가 유니테리안 보편주의 회원이다.
1) 정의
오늘날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은 유니테리안 보편론자협회(UUA)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유니테리안 보편론자협회는 교제, 교회들의 연합 혹은 어떤 폭넓은 원리들과 목적들에 서명한 협회들 그리고 그들 자신을 매사츄세츠 주 보스턴에 본부를 둔 유니테리안 보편론자협회 교단과 조직에 가입한 것으로 정의한다. Alan Gomes, Unitarian Universalism(Grand Rapids: Zondervan,1996), 9
이 협회는 1961년 미국 유니테리안협회(AUA, 1825년 법인체가 됨)와 미국의 보편론자 교회(UCA)의 합동이다.
유니테리안의 이름이 붙은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만인의 구원을 믿기 때문이며 보편 구원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성주의자, 과학주의자, 그리고 도덕주의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옥이나 영원한 심판의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이라며 모두 반대한다.
사람은 부패한 상태로 나지 않았으며 선과 악에 대한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에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이 구원으로 선택한 사람들 대신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 이들은 성경을 이성적으로 해석하다가 삼위일체와 지옥을 부인했던 여호와의 증인처럼 선하신 하나님은 누구도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는 지옥으로 보내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2) 유니테리안의 역사
유니테리안의 이름은 16세기 종교개혁 때 발생해서 유럽에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1) 유럽 대륙
유럽에서 유니테리안주의를 시작한 인물은 칼빈이 제네바 시에서 개혁을 시도할 때 삼위일체를 부인함으로써 처형된 세르베투스(Arian Michael Servetus 1511-53)였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삼위일체의 오류에 관하여⌟(On the Errors of the Trinity in Seven Books,1531)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면서 삼위일체 교리에 반대했다. 삼위일체는 교황과 정신 이상(미친)의 산물이며, 복음서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유니테리안주의 성장에 기여한 또 다른 대륙의 인물로는 소시너스(Faustus Socinus, 1539-1604)로서 그는 종교적 자유에 대한 물음에서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글과 논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본질이시며 그 본질은 한 인격 아버지를 함유한다. 예수는 그의 삶에서 완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부활 후에 위임된 신격으로 부를 수 있도록 보상받았다. Ron Rohodes, 상게서, 232
그리스도는 승천 후에 효과적으로 신성에 입양되신 분이지 그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었다. 죄는 형벌의 대가가 요구되지 않는다. 죄는 하나의 반칙이나 위반이기 때문에 용서는 십자가 수난의 효과가 아니다.
소시니스는 1604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폴란드의 유니테리안주의를 위해 크라코우(Cracow)에서 그의 사역을 지속했다. 그의 신학적 저술은 다음해 라코비안 교리문답을 위한 기반을 형성했으며 그 문서는 신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소시니안 진술이 되었다. Meic Pearse, 전게서, 212.
소시니안 형태의 유니테리안주의의 라코비안 교리문답이 1652년 비들(John Biddle)에 의해 번역되어 영국에 소개되면서 19세기 영국의 장로교인 다수가 유니테리안이 되었다.
(2) 영국
영국의 유니테리안주의 아버지는 옥스퍼드 출신의 존 비들(John Biddle, 1615-62)이었다. 그는 삼위일체교리를 논리와 성경으로 반박했다. 그는 ‘성경에 의한 거룩한 삼위일체에 관한 신앙의 고백’(A Confession of Faith Touching the Holy Trinity According to the Scriptures)을 썼는데,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는 이성과 성경 모두에 모순된다고 했다. 그는 이 견해를 위한 논증에서 자주 성육하신 그리스도가(인간으로서의 예수) 그의 아버지에게 의존하심(예, 요 14:1-14)을 인용했다. 그는 마침내 그의 이단적 신앙 때문에 유배되었다가 1662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린세이(Theophilus Lindsey, 1723-1808)는 영국에서 또 다른 유니테리안주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는 반삼위일체적인 견해 때문에 그리스도와 성령께 예배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1773년 런던에 교회(the Essex Street Chapel)를 세웠고, 그 교회는 유니테리안주의를 확장시키는 토론장(Platform)으로 사용되었다.
(3) 미국
미국에서의 유니테리안 보편주의는 18세기 말에 와서야 영국에서 유입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막강했던 회중교회가 제일 큰 영향을 받았고 125개의 교회가 유니테리안 편에 가담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유니테리안주의의 성장에 기여한 인물은 적지 않다. 조나단 메이휴(Jonathan Mayhew 1720-66)는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설교를 했으며 하나님의 엄격한 단일체에 대한 글을 썼다. 조셉 프리스트리(Joseph Priestley, 1703-1804)는 산소를 발견한 뛰어난 화학자로 동정녀 탄생과 예수님의 무죄를 부인했다. 그는 1794년 펜실베니아의 노덤버랜드(Northumberland)와 1796년 필라델피아에 유니테리안 교회를 세웠다.
채닝(William Ellery Chaning, 1780-1842)은 엄격하고 교의적인 칼빈주의에서 떠나 보다 자유주의적 신학으로 옮겨가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응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했으며, 형이상학적인 삼위일체의 제1위이신 예수님보다는 영적 능력이 충만한 인간의 삶을 산 인간의 모범으로서 예수를 더 많이 말했다.
채닝은 유니테리안주의의 사도로 알려졌으며, 그리스도는 인간보다는 더 나은 분이지만 하나님보다는 못한 분임을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연합을 논증하는 대신에 성육신의 그리스도가 인성과 신성 모두를 지니셨음을 부인했다. ‘유니테리안 기독교’라는 설교에서는 성경적으로 삼위일체를 논박했으며, 그 사상의 불합리성을 논증하려고 했다. 그는 유니테리안 신앙의 궁극적 권위는 성경에 나타난 과거의 음성이 아니라 경험과 이성의 살아 있는 음성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성에 대한 헌신은 보편주의(만인 구원)로 이끌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영원히 지옥으로 저주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1800-1835) 지도적인 사상가들은 아직도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를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니테리안주의의 교황으로 간주되었던 앤드류 노턴(Andrew Norton)은 비판주의자들의 공격에서 기독교를 변호했는데 특별히 성경의 연구 분야에서였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9-82)은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를 부인했으며, 진리 발견의 방편으로 감각을 지배하는 직관을 중요시했다.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이나 교회의 역사적 전통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직관이 최종적인 권위였다. 그는 모든 일에서 자기 신뢰를 강조했다. 마침내 미국 유니테리안협회(AUA)가 하바드 신과대학의 졸업생 10여 명에 의해 1825년에 설립되었다.
얼마 후 1867년에는 보다 더 급진적인 유니테리안들이 믿음의 완전한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 종교협회(The Free Religions Association)를 결성했다. 이 시기(1835-1885)는 미국의 유니테리안주의의 제2기로 보수적인 정신이 훨씬 더 줄어들었으며 독일의 관념론 철학이 미국 동부의 대학들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제3기는 1885년부터 현재까지로 보는데 세속주의가 유니테리안주의와 보편주의안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마침내 1961년 두 단체가 통합되었다.
1900년대 초에 인본주의가 유니테리안의 회원들 안에서 발생했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외부의 신적인 도움을 구하는 대신 인간의 능력이 충분함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유신론적 유니테리안 신자들 안에 소규모의 분열이 있었다. 그러나 1933년 인본주의 선언 제1에 서명한 사람의 절반이 유니테리안 신자였다. 점차 유니테리안 보편주의자들은 종교는 반드시 과학적 정신에 맞아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존 머레이(John Murry, 1741-1815)가 미국에 첫 보편론자들의 교회를 세웠으며(독립 기독교회), 호세아 발로우(Hosea Ballou, 1771-1852)는 보스턴에 제2 보편론자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발로우는 원죄, 기적, 삼위일체 그리고 지옥으로 인한 영원한 심판을 부인했다. 머레이와 발로우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인간의 선 그리고 만인 구원을 강조했다. 선택을 말하는 칼빈주의에 반대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안목에서 선택되었다고 했다. 발로우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것을 결정하셨다고 했다.
오늘날 유니테리안 보편주의자의 목사들은 세 개의 대학교 중 하나에서 훈련받고 있다. 하바드 대학교, 미드빌-롬바르드(Meadville-Lombard, 시카코 대학에 병함됨)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스타 킹 스쿨(Starr King School)이다.
3) 유니테리안 보편론자의 신학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은 다양한 믿음을 포용한다. 믿음의 권위는 옛날의 계시가 아니라 현재의 경험에 근거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유니테리안은 자유주의적 기독교, 인본주의, 지구 중심의 영성 그리고 뉴에이지의 영성의 경험 등에 이끌린다.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은 어느 한 종교의 신학 체계에 헌신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종교의 길이 무엇이든 그것을 따라가는 데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믿을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이성과 양심의 권위를 믿으며 종교에서 궁극적인 중재자는 교회나 문서 혹은 지도자(an official)가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과 그 개인의 결정이라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더 이상 기독교의 교단이 아니며 내적 신앙협회라고 한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교리적 신조에도 서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신조는 고정되고 균일한 종교적 믿음을 포함하기 때문에 배격한다.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은 종교적 포괄주의와 종교적 관용이 덕이라고 한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란 있을 수가 없다. 그들 자신을 포함해서 종교는 없다. 모든 사람은 그들 안에 있는 진리를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따라서 유니테리안 보편주의 안에는 자유주의 기독교인, 새로운 이교주의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인본주의자, 뉴에이지 만신론자 혹은 자유주의적인 유대인, 그리고 더 많은 유의 신봉자들이 있다.
1997년 1만 명의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는 46.1%는 인본주의자, 19%는 지구와 자연 중심론자, 13%는 유신론자, 9.5%는 자유주의적 기독교인, 6.2%는 신비주의자, 3.6%는 불교 신자, 1% 미만은 무슬림과 힌두교인이었다. 이렇게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은 다양한 종교적 견해를 지니고 있으며 공통점이 있다면 윤리적 삶을 침해하는 어떤 믿음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825년 미국 유니테리안 협회가 결성될 때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어떤 신조의 공식화도 반대했다. 1790년 필라델피아 첫 진술서는 기본적으로 정통 칼빈주의자의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것을 정확한 형태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1935년에 유니테리안주의와 통합되기 전에 한 다른 진술서에서는 공동 목표를 예수님이 드러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가 사시고 죽으신 나라를 세우는 데 협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1961년 두 단체가 연합하여 유니테리안 보편론자협회(UUA)가 되면서 기독교적인 요소가 점차 사라지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종교 다원주의적인 사상이 더해지게 되었다.
1985년 협회가 목적 진술을 다시 개정했는데 그 내용 중에 세계의 종교들로부터의 지혜는 윤리적이고 영적인 삶에서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고 되어 있다. 유대 기독교의 가르침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라고 명령한다. 힌두교의 가르침들은 이성의 안내와 과학의 결과들에 주의하도록 조언하며, 마음과 정신의 우상들을 대적하도록 경고해 준다고 했다.
회원의 언약 중에는 각 개인의 타고난 가치와 존엄, 인간관계 안에서의 정의, 평등과 사랑(동정), 회중 안에서 서로 용납하며 영적 성장을 하도록 용기주기, 진리와 의를 추구하는 자유와 책임, 양심의 자유와 회중 및 사회에서 민주적 과정의 사용, 세계 공동체의 목표로 평화, 자유 그리고 민인을 위한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
위에서 본대로 유니테리안 보편주의는 자유와 관용의 종교다원주의적인 사상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모든 종교를 포용하지만, 그 반대로 종교를 배격하거나 제한적으로만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이 기독교를 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계시에 근거한 종교가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의 표현에 기초하는 기독교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다양한 종교적 표현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4)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의 교리
(1) 권위의 원천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은 자유로운 생각을 강조한다. 따라서 기존의 어떤 교리나 신조를 수납하지 않는다. 멘델손(Jack Mendelsohn)은 “성경과 교리는 사람이 창조해 낸 것이다. 성경은 부정확성과 불일치 그리고 오류들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했다.
그들에 의하면 물론 성경엔 진리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가 있는 인간의 작품이다. 성경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힌두의 베다스(Vedas), 무술림의 코란과 같은 것으로 보며, 어느 면에서 유일하거나 독점적인 책일 수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 종교의 중심문서가 아니라고 한다.
성경을 인간의 산물로 보는 저들은 본문상에 오류가 있다고 보며 성경의 고등비평을 시도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취한다. 또 구약은 유대 민족의 초기생활과 사상 및 투쟁에 대한 기록이다. 신약은 예수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가 죽고 나서 오랜 후에 주어진 예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설명이다.
사복음서의 예수는 역사적 실제이기보다는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적 편견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보다 역사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는 자료집 정도로 본다.
성경의 윤리도 그들에게 맞지 않는다. 성경에는 그들이 보기에 야만적인 것과 너무 엄격한 것들이 있다. 이혼과 동성연애에 관한 것 등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오류가 있는 인간의 작품으로 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읽거나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따라서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에게 성경은 권위의 원천이 아니다. 그들에게 권위의 원천은 이성이고 양심이며 개인적인 경험이다. 그들에게 성경은 신화다.
(2) 하나님
유니테리안파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부인한다. 그들은 그들의 영감이나 성취를 위해서 초자연적인 존재가 요구되지 않는다고 한다.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포용한다. 그들은 각 개인에게 의미가 있는 하나님에 대해 개인적인 개념을 발전시킨다고 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또 어떤 이들은 어머니 신을, 다른 이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는 견해를 지닌다. 하나님은 높은 수준의 능력이며 내 안에 있는 신적 섬광이고 자연의 배열 원리(우주의 유지하는 질서)다. 또 다른 이들은 변하고 진화하는 하나님을 주장하기도 하며, 어머니 지구나 여신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따라서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의 하나님은 정의하기가 힘들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니테리안 보편주의는 인격적인 하나님 대신에 이교적인 철학, 다원주의 종교, 기독교 진화론, 뉴에이지 사상을 총망라한 신론을 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에게 성경이 말씀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신화나 전설 시대에 사람이 고안해 낸 하나의 이론일 뿐이다.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이성을 초월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순이며 다양한 이론 중의 하나일 뿐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유니테리안 교회의 대표자는 룩(Look)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유니테리안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소망이든 기독교의 공상이든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의 성육신이거나 삼위일체의 제2위이시라거나 말세에 마지막 중재자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또 멘델손(Mendelsohn)은 “대부분의 유니테리안들은 예수는 기껏해야 유대인의 메시아로 생각한다”고 했다. 사도 바울 같은 후대의 추종자나 해석자들이 예수를 인류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속죄하는 기독교의 구주로 변경시켰다고 한다.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은 인간의 선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원죄 같은 것은 없다고 한다. 이런 전제 아래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해석한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이시거나 어떤 초월적인 존재이실 이유가 없다. 죄나 심판을 해결할 구주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써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다 높은 도덕적 목표로 승화시킬 때 얻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간으로서만 중요하며, 이런 면에서 그의 삶의 방법, 사랑의 능력, 모범의 힘과 그의 가치를 존중하며 존경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어떻게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 존경받는다.
유니테리안 보편론자의 책 ⌜선택된 신앙⌟(A Chosen Faith)에서는 예수가 중요한 것은 이적적인 출생이나 그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주장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그의 사랑의 능력, 가르침의 단순성 그리고 공인권을 빼앗기고 짓밟힘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섬기신 그의 모범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Buehrens and Church, A Chosen Faith, 7; Ibid,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 모범이요 스승이다. 우리는 그의 모범을 본받아야 하며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예수가 하신 모든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 다만 우리와 다른 것은 정도의 차이다. 예수는 우리가 한 것보다 영적인 높이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은 것뿐이다.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은 그리스도는 예수를 구현한 신적 원리로 보며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그리스도를 구현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예수처럼 모든 사람도 그리스도의 의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적이나 동정녀 탄생 그리고 부활을 신화적으로 생각하며 배척한다. 따라서 사복음서에 기록된 기적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복음서 저자들의 편견이라고 한다.60) 여기서 우리는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의 기독론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별하고 모든 사람이 신적 원리인 그리스도의식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에서 유니테리안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영지주의와 근래에 크게 확산되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서로 닮았다.
(4)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유니테리안파에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별 의미가 없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유니테리안파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견해와 자세는 무엇인가?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회의 교리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주장한다. 그리고 거룩한 교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누구라도 연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교리가 사실에 대한 가장 미미한 증거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그 교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안다. 그것은 단지 젊은 여인을 의미하는 ‘알마’(Alma)라는 히브리어의 오역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 말이 헬라어 번역에서 ‘팔세노스’ 즉 처녀로 나타난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헬라어 역본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오역을 거듭한 것이다. 학자마다 이 사실을 알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선포하는 데서 신중을 기해 왔다. 나는 그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교리가 당신의 어머니와 내 어머니의 순수한 여성다움에 진흙탕물을 튀기기 때문이다. 우리의 출생은 예수의 것처럼 신적인 것이며 우리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사랑은 마리아의 사랑처럼 순수한 것이다.”
이처럼 유니테리안파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며 신약성경의 동정녀 탄생 주장은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를 오역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며 일축해 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게 부인할 수 있을까? 구약성경, 특별히 이사야서는 메시아의가 단지 젊은 여인에게서 탄생할 것으로 예언하고 있는가?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 죄값을 치르실 유일한 자격자로 묘사하고 있을 때 동정녀가 아닌 젊은 여자에게서 태어날 것을 가리켰을까? 예수님에 대한 거의 400여 구절이 넘는 구약의 직접·간접적인 예언들을 신중하게 연구하고 다루지 않고 단어 하나를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의 대세를 돌려놓을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없이는 십자가가 의미 없게 되고 죄의 용서와 칭의, 구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고 그 이성에 맞는 것만을 골라 주장한다면 성경의 기독교는 와해되고 말 것이다. 유니테리안파의 일관된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없애려는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의 신격화와 신의 인간화를 시도하고 있다.
(5) 인간의 타락
인간의 본성은 타락했는가? 유니테리안파는 타락과 타락의 결과에 대한 견해에서 정통교회와 크게 다르다. “내가 만일 내 복음을 바로 이해했다면, 1세기 갈릴리의 그 사람과 19세기의 영국과 미국 사람 사이의 차이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타고난 능력에 있지 않고 인류에게 공통된 잠재력 실현의 상대적인 정도에 있다.”
위의 주장은 예수님과 다른 사람과의 차이는 잠재력의 실현의 정도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타락은 역사적인 사실인가? 타락의 결과는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아담과 하와의 창조, 그들의 초기의 순결함 그리고 그들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를 위해 하나의 민속이 되었다. 그 안에서 타락은 죄의 기원을 설명했고, 타락의 기초에 관하여는 어거스틴에 의해 세워진 죄에 대한 번식의 지독한 이론이 공식적으로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다윈의 승리는 전 신학적 계획을 파괴했다”.
유니테리안파는 인간 타락의 기사를 하나의 옛날 민속이나 신화 정도로 보아 그 역사성을 무시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이래로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된 옛날 어거스틴의 모순된 이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타락이 없다면 인간의 본성은 어떠한가? “우리는 인간의 오랜 기간의 발생(진화론 사상)과 인간성의 존엄과 신성은 믿는다. 우리는 신중하고 열렬하게 우리가 지존자의 자녀요, 우리의 본성은 타락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며, 우리 안에는 신적 아름다운 본성이 잠재해 있어서 발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런 견해들은 유니테리안파의 인간론이 곧 진화론자의 것임을 보여 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타락은 없고 인간의 본성은 선하며, 무한히 선하고 유용하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타락이 없는 유니테리안파는 타락의 결과도 있을 수가 없다. 원죄가 있을 자리가 없으며, 인간은 죄인이 아니다. 죄는 실수일 뿐이므로 스스로 고칠 수가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선한 본성에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으로 차 있는 인간이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교육을 통해서 발견하고 개발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유니테리안파는 현대의 세속주의적 인본주의 교육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어버지시라는 뜻은 인간이 본질에서 신성임을 의미한다. ….. 유니테리안주의의 이 근본적인 사상은 폭넓게 실제적으로 적용한다. 그것은 교육과 개혁에 대한 우리의 모든 사상을 수정하고 조절한다. 현대 교육은 어린이의 자연적 본능에 대해 더욱더 신뢰한다. 현대 교육의 표어는 억제가 아니라 표현이다 …성격은 우리의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표다”
인간성은 처음부터 선하며 타락은 없으므로 조금도 그 선함에 손상을 입지 않았다. 그것은 무한한 선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교육을 통해서 개발하고 발전만 시킨다면 인간 세상은 점점 더 살 만한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죄 없는 인간성은 언제나 급하게 제어되어서는 안 되며 존중과 격려와 방임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유니테리안의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고 있는 성경과 정반대의 입장이다.
(6) 교회
전통적인 교회관은 어디까지나 신앙과 경건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되어 왔다. 철저한 개혁자 칼빈에게도 교회는 우리가 연합을 유지해야 하는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로서의 교회였다(Institutes IV). 보이어(Louis Bouyer)는 칼빈의 교회관에 관하여 “교회는 신자들의 믿음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신자의 어머니로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 유니테리안의 교회관은 무엇인가?
“교회는 단지 인간의 종교적 관심사에 대한 하나의 조직일 뿐이다. 교회의 전통이나 요구나 형식이 무엇이든지, 교회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적이고 영적인 지식에서 당연히 나오는 것 이상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 다른 모든 기관과 같이 이 교회는 입회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떤 형식을 통해서 들어와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가 있으나, 영원한 상급이나 영원한 멸망을 선언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의 권리와 권세를 넘어서는 것이다. 교회에 속한다는 것이 사후에 특권의 지위를 안전하게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회원들이 가장 순수하고 고상한 성품의 모범으로 살고 있을 때 공동체 안에서 구원하는 의로운 능력이다.”
유니테리안파의 교회관은 성경의 영적인 특성을 빼버린 인간적인 집단일 뿐이다. 교회의 생명은 생명 되신 예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회원의 성품과 윤리적인 삶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의 생명은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산돌이 된 신자들이 모여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거기서 신자들이 신령한 제사를 드릴 영적 제사장이 되는 데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벧전 2:4-5).
(7) 기도
유니테리안파는 기도에 대한 이해에서 전통적인 교회와 그 의견을 전혀 달리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것은 그들의 잘못된 신관과 인간관에서 연유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조주와 섭리주로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자연의 질서나 법을 깨뜨리고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런 것은 무지와 미신적인 시대에서나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폭넓은 사상을 가졌으며, 이제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기원이 아니라 협력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도록 구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도록 우리 자신을 서약하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게 성숙했다는 주장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돕는 자가 아니라 협력자요 동역자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기도란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가진 잠재자로서 자기 발견이요 자기 계발이며, 자기 성취 그 이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기도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는 것이다. 이런 기도를 위해서는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거나 성경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한다. 위에서부터 오는 계시나 저 너머에서 오는 계시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참 기도는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이해를 조명하는 그 양심의 빛과 이성의 빛, 우리 마음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정의를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빛을 발견하며 그것들의 인도를 따르므로 영생의 길 안에 있게 된다'.
(8) 구원
인간은 죄인이 아니며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다. 인간은 선하며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섬광이 있고 그리스도의 의식이 있다. 따라서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은 가끔 구원이라는 말을 문화 재건의 의미로 쓴다. 구원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며,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불공평한 어떤 것으로부터 구출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종 차별이나 성 차별 그리고 동성애의 차별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구원은 죄나 죽음에서 구출되는 것이 아니라 성품의 개발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 세상 에서나 세상을 위한 구원은 인간의 온전한 성품이 되거나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이 마음과 정신과 삶의 의미에서 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구속은 죽음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이 선물이라는 사실로 깨어나는 데 있다.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의 구원론은 죄나 그 결과인 심판과 죽음에서의 구원이 아니다. 따라서 죄 용서와 죽음에서 구원해 줄 구주가 필요 없다. 구원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도덕적 품성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며, 이 세상을 좀 더 잘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차별이 없고 불공평함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의 구원은 은혜 구원 대신 자력의 행위 구원이며 개인 구원의 복음이기보다는 사회 구원의 복음에 일치하는 구원관이다.
(9) 천국, 지옥, 내세
천국이나 지옥 그리고 내세에 대한 유니테리안 보편주의자들의 견해는 한결같지 않다. 소수의 신자들은 사후에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곳으로 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다수는 죽음이 인간 존재의 마지막이며 완전한 끝이라고 믿는다. 또 어떤 신자들은 천국과 지옥을 단순히 불멸로 이해하기도 하며 천국과 지옥의 사상은 부도덕하다고 한다. 장래의 상급이나 심판의 약속 때문에 사람에게 선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해롭다고 한다. 이런 견해는 그들의 전제(인간은 선하며 도덕적 성품 개발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장래의 유익이나 상급을 바라는 선행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지 못하다.
내세의 천국이나 지옥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이다. 이렇게 오늘의 현재가 중요한 그들에게는 오늘 지상에서 가능한 한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천국과 지옥의 내세가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이 세상의 삶이 곧 천국의 삶인 셈이다. 죽음이 존재의 끝이요 마지막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부활 같은 것은 없다. 육신은 죽으면 썩고 먼지가 되고 만다. 다만 그들에게 불멸이란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데 있다. 따라서 선한 유산을 남기는 것이 사람을 불멸하게 하는 것이다.
월터 마틴(Water Martin)이 지적한 대로 유니테리안이 굶주린 탐구자의 세대를 위해 준비하지 못한 것은 만족케 할 한 양식인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타락한 인간은 죄인이다. 그런데 이성과 도덕으로 죄의 문제를 풀고 자신을 구원하고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은 역사가 보여 주고 있듯이 한낱 환상일 뿐이다. 이런 불가능한 환상에서 깨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인간관을 바꾸고 참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기독교와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를 비교하면 아래 표와 같다. 기독교와 유니테리안 보편론자들은 무엇이 다른가?
| 유니테리안 보편론자의 견해 | 기독교의 견해 | |
|---|---|---|
| 권위 | 이성과 경험 | 성경 |
| 성경 | 많은 성서 주의 하나 |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 |
| 진리 | 상대적 | 절대적 |
| 기적 | 신화 | 역사적 실제 |
| 하나님 | 많은 해석들로 열려 있음 | 한 분 하나님, 야웨 |
| 예수 | 메시아가 아님. 인간의 모범 | 인간의 구주 메시아 |
| 인간 | 죄가 없음(인간은 선함) | 인간은 죄인 |
| 구원 |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한다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
요약과 평가
유니테리안파는 라에리오와 파우스토 소시너스에 의해 시작된 반 삼위일체 운동이었다. 사상적으로는 이성주의와 자연신론의 영향이 컸으며, 영국에서 번성하면서 영국의 미국 식민지에 이식되었고, 제2차 각성 운동 기간에는 뉴잉글랜드에서 발생했다. 미국에서 이 운동은 하버드 대학을 중심으로 그 졸업생들의 힘을 얻으면서 처음에는 보스턴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과 불경한 자유 사상가들에 의해 뉴잉글랜드의 자유주의자들에게 확산되었으며, 리먼 비처(Lyman Beecher)가 보스턴 교회를 목회하면서 그 부흥을 힘입어 크게 확산되었다. 처음에 유니테리안 선교는 하나님의 부성, 인류의 형제됨 그리고 보스턴의 이웃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 지역성을 벗어나 전국적이 된 것은 브라이언트(Bryant), 롱펠로(Longfellow), 로웰(Lowell) 그리고 홀메스(Holmes)의 문학 작품을 통해서였다.
밴 발렌(J. K. Van Baalen) 교수가 옳게 지적하고 있듯이 유니테리안파는 현대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한 파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유니테리안파는 진리 판단에서 최고의 권위를 성경 대신 이성에 둔다. 인간 본성의 선함과 이성의 능력은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부인한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겼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이나 미숙 또는 발전되지 못한 상태일 뿐이다. 사람이 죽는 것은 결코 죄값이 아니며, 인간은 죄인이 아니다. 따라서 유니테리안파는 죄인을 거룩하신 하나님과 구별하지 않고 나아가서 피조물과 창조주의 차이도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인간의 신격화와 신의 인간화를 서슴없이 시도했다.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로 성경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도 그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신조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사실을 잘 입증한다. 그들은 인간의 타락, 성육신,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 천국과 지옥, 이적과 기사 등은 신화요 시대에 뒤진 구시대의 유물이거나 과학적인 진화론 출현 이전의 비과학적이고 반 이성적인 이론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유니테리안파는 18세기 이성주의와 자연 신론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
유니테리안은 내세, 천국, 사후에 대한 기독교의 중요한 관심사를 현세, 세상의 삶으로 돌려놓음으로써 기독교를 하나의 세속적인 윤리 종교로 전락시켰다. 완전한 이성, 선한 본성, 신성을 지닌 무한한 가능성의 잠재자인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운명을 책임질 수 있으며 하나님 없이도 책임 있게 세상을 보다 더 살 만한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진화론적인 사상, 이성주의, 과학주의, 세속적인 인본주의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유니테리안파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하나의 도덕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근래에 보편 구원론자들과 연합한 그들은 예수님은 선지자 이상이 아니므로 그가 세운 성례는 지킬 필요가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더 나아가 보편 구원 교회의 특성에 따르면, 이들의 목적은 기독교든 그 밖에 어느 종교든 모든 종교적인 신앙의 신봉자들 중에서 조화를 장려하는 것이다. 이런 포괄주의 때문에 비록 어떤 유니테리안 교인들이 지역 교회 그룹에 소속되어 있을지라도 이 협회가 미국 기독교 지체들(예컨대 교회협의회)에 의해서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게 하였다.
유니테리안 보편주의가 가진 신앙의 해이, 불건전한 사상, 체계적인 교리의 부재, 그리고 18세기와 19세기의 사상 및 진화론의 인기 감소로 인해 앞으로 이들의 운명은 어두울 것으로 생각된다. 유니테리안 보편주의는 성경을 떠난 기독교는 기독교일 수 없으며, 이성으로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로는 결코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진리를 잘 깨우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