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 6:11) 신자가 되면 으레 세례를 받는 것은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세례가 구원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전혀 관계가 없는가? 만일 있다면 어느 정도인가?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듣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에서는 세례와 구원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새로워짐과 거룩하게 됨, 그리고 개종 및 중생과 연관되어 세례를 언급하고 있는 아래의 구절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이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같이 우리를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6:4). 위의 구절 중에 세례와 관계가 없는 것도 있다. 예컨대 고린도전서 6:11의 씻음은 세례에 대한 암시로 생각하나 두 가지 이유로서 세례가 아니라고 해석된다.
1. 바울은 세례에 대해서 말씀할 때 본문의 헬라어 엔(en, in)을 사용하지 않고 에이스(eis, into)를 썼다. 2.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다는 말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 혹은 세례때 성화 되었다거나 칭의 되었다는 말을 병행 해서 쓰지 않았다. 여기서 바울의 관심사는 기독교의 입교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되고 성령으로 가능한 영적 변화였다. 바 울에게 있어서 중생이나 성화나 칭의는 세례의 결과가 아니라 신자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역사였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구원은 믿음의 구원이다. 그러나 믿음은 포괄적인 말이어서 다양한 내용의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이 신약에서 구원을 초래하는 낱말이 각각 다르게 쓰인 이유일 것이다.
1. 구원은 회개를 통해서 온다(벧후 3:9; 고후 7:10; 눅 13:3; 행 3:19; 11:18). 2. 구원은 신앙을 통해서 온다(행 16:31; 엡 2:8-9). 3. 구원은 신앙고백을 통해서 온다(롬 10:9; 10:13). 4. 구원은 중생을 통해서 온다(딛 3:5; 요3:3-5). 5. 구원은 세례를 통해서 온다(벧전 3:21).
신앙과 같이 세례도 죄의 용서를 가져오며(행 2:38; 22:16; 10:43; 롬 4:3-8)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할 뿐 아니라(갈 3:27; 엡 3:17)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한다(갈 3:26-27; 요 1:12). 스테인(Robert H. Stein)은 신약성경에 구원을 위한 다섯 가지 차원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회개, 신앙, 고백, 중생(혹은 성령을 받음) 그리고 세례이다. 이것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신약의 모형 즉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주로 예수를 고백하는 개인과 그의 영을 주셔서 개인을 중생케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개인을 세례주는 교회의 세 당사자를 위협하는 것이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 관계를 결혼과 연관시켜 설명하며 그 어느 것도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면 결혼허가서, 결혼서약 그리고 부부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회개, 신앙, 신앙고백, 중생, 그리고 세례 중 어느 하나로 구원받게 되는가? 만일 우리가 구원 문제를 세례와만 연관시켜 필수적이라 본다면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결혼허가서나 결혼의 서약이나 부부의 관계는 결혼에서 다 필수요소이지만 그 어느 것도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 세례를 통해서 구원받는다, 또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구원받는다, 회개와 중생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했다 하여 그 어느 하나를 들어 그것이 구원의 주된 통로 인양 주장하게 되면 적잖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사실 그런 것들은 믿음과 신앙의 내용이요 요소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진정한 신앙은 회개, 칭의, 중생과 성화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참 신앙을 소유한 성도는 자연히 그 확증이라고 할 수 있는 세례 받기를 원할 것이다. 그것은 세례 역시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마 28:19). 어거스틴은 세례가 구원을 위해 절대 불가결한 것이라고 보았다. 로마 가돌릭교회에서는 세례는 원죄를 제거해 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의 성례에 참예없이 구원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바로 밝혔듯이 세례 자체에 무슨 사죄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례자는 회개해야 하며 말씀의 은혜로 효과가 있는 것이므로 세례자가 이 믿음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따라서 세례를 은혜의 성례로,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죄를 씻는 것으로 중생과 연관이 있게 본다고 해도 믿음이 없이 참여하는 세례 의식은 은혜의 수단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례도 믿음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 믿음 없는 세례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냐? 는 물음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세례는 오히려 구원받은 자, 죄를 씻음받은 자의 표요, 확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같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언약의 표였으며 할례를 받은 것은 언약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된 증거였다(창 17:11).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그런데 그 믿음은 행함 즉 지정의가 변화되어 내 삶이 변한 증거가 있는 믿음이다(약 2:26).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할 수 있다. 비록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세례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그것은 내적 기질이요 그 동사가 의미하는 것은 외적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그 문맥에서 세례를 가리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바울은 비유적인 씻음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계 9:20-21). 또 그 접두사 아포(apo)는 죄의 완전한 씻음을 가리킨다. 그 시제는 과거로 단순과거는 하나의 결정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세례는 죄를 씻는 의식이기보다 이미 죄의 씻음과 칭의에 대한 외적인 확증이요 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주 1. Golden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thians(Eerdmans, 1988), pp.246-247 2. R.H. Stein, Difficult Passages in the Epistles, pp.123-124 3. Leon Morris, 1 Corinthians, Revised ed., p.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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