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아내의 주(lord)인가?
RevSuh  2008-08-17 10:46:23 hit: 1,049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벧전 3:6)
                                          
우리는 오늘 여성 해방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 신약을 보면 여성에 대한 언급들이 크게 모순되게 보인다. 오늘 본문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는 아내들에게 그들의 남편을 마치 주인처럼 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본문은 여자를 제2급의 신분으로 내려놓고 학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본문은 창세기 18:12의 인용이다. 거기서 사라는 웃으면서 자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하였다.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내 주인(my lord)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지도자요 그 가정의 머리로 인식한 것이다.1)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대한 적절한 존경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아브라함에게 존경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웃어 버린 아이러니가 있다. 그래서 다른 신약의 저자와 같이 베드로도 이 말이 단 한번만 사용되었을 뿐임으로 그 문맥에는 관심이 적었다.
  
그렇다면 여기 베드로전서의 문맥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문맥에서 베드로는 불신 남편과 상류 계급의 크리스천 아내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그 반대인 경우는 가능성이 훨씬 적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아내들은 그들의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충고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논쟁이나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덕스러운 행위가 남편들을 개종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이런 복종은 역시 모든 여성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사라와 같은 구약의 거룩한 여인들의 표지였다. 그러므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은 경건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천 여인의 표지이다.
  
그러면 여기서 복종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1. 그것은 그들의 기독교 신앙의 실천을 포기하거나 예수님에 의해 정해진 거룩한 삶의 표준을 타협하는데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여인들은 계속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옳은 것을 행하는 자들이었다. 개종되지        않은 그들의 남편들은 어쩌면 그들이 교회의 모임에 나가지 못하게 할 뿐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금하신 어떤 일         을 하도록 강요하면서 이혼의 가혹한 처사로 그들을 위협했을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계속하
     여 소망을 두고 순수하며 고요한 정신을 가진 여성은 환경이나 불신이나 불순종한 남편에 의해서도 두렵게 되         지 않았다.2)  그들은 그리스도께 헌신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했고 그 고통을 두려움 없이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       므로 이런 경우에도 크리스천 여성의 복종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했       다. 지금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종교적인 일을 포함한 모든 일에 그들의 남편에게 복종하였다.
  
   2. 그러므로 여기 모형은 크리스천의 결혼을 위한 이상으로서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결혼에서 아          내는 생명의 값진 선물에 관한 한 남편과 함께 상속자인 것이다. 아내는 복음에서 남편과 동등한 배우자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이 참으로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는 복음 전도의 전략을 소개하였다. 사람들은 말만으로나 반대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덕이 기독교의 덕과 일치될 때에는 온전히 그 이교의 덕성에 따라 삶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아 올 수 있었다.
  
둘째로, 그는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위치가 복종의 길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신약의 저자는 아무도 복종에 대한 문제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천하신 바요 베드로가 2:23에서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자유는 능력 있게 권세를 포기하는 것이요 그들의 부나 재산을 나누는 것이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압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성령의 결과는 요구하는 데서가 아니라 주는 데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라의 행위는 신약의 덕과 일치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녀의 이 실례는 특별히 그 시대 여인들을 위한 책임 있는 역할로 주어진 것이다.
  
셋째로, 그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5:12-13에서 언급한 모형을 따랐다. 거기서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표준을 비크리스천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불신자들은 결국에 기독교 표준을 따르는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불신 남편의 행위가 아니라 그 아내의 행위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그녀만이 그리스도인의 덕을 보여 줄 수 있으며 남편이 믿음에 이르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도리어 그녀를 베드로전서 3:7에 교훈 된 것처럼 동등하게 대우해 주게 될 것이라고 소망할 수 있었다.3)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불신 남편을 가진 신앙인 아내는 그 남편 구원을 우선순위에 두고 말이나 논쟁이나 반항으로가 아니라 신앙의 덕으로 감화시켜 구원해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비기독교적인 덕행이라도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면 실행해야 한다. 그것이 내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하며 마침내 남편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주
   1.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New Testament, p.849
   2. Wayne Grudem, I Peter(I.V.P., 1989), p.142
   3. Peter H. Davids, More Hard Sayings of the New Testament, pp.156-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