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4-26)
바울 서신 특별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는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행위로 의로워진다고 가르치는 것 같다. 다음의 구절들이 그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2-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역시 바울은 로마서 3:28에서도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의 칭의를 주장하는 데 반해서 야고보는 사람이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하였다(약 2:24). 믿음으로만의 칭의를 부르짖으며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마틴 루터는 행위를 내세우는 야고보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야고보서가 복음을 담고 있지 않다고 보고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낮게 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말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모순된 주장을 했는가?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믿음인가? 행위인가? 먼저, 두 사도가 어떤 배경과 형편에서 이 말씀을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유대의 랍비 신학에서는 율법과 행위, 신앙과 순종, 순종과 공로, 상급과 축복은 하나의 통일체였다.1) 이런 전통에서 랍비들은 아브라함은 그의 공로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 신자들은 칭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유대의 전통에서 분리시키려고 하였다. 바울의 이런 입장에 비해 야고보에게는 말뿐인 신앙, 머리로 수긍하기만 하는 사실에 대한 지적인 동의는 귀신까지도 가지고 있는 신앙이었다(약2:19).
역시 행위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서로 달랐다. 바울에게 행위는 신앙에 정반대요(롬 4:2-5) 하나님의 은혜에 대조되는 것이었다(롬 11:6). 그에게 행위는 유대 율법을 지키는 것이요 특별히 할례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이는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려는 계율적인 노력이며(롬 3:20; 4:2),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게 하는 것이며(롬 4:2), 하나님을 빚진 자로 만드는 것이었다(롬 4:4). 그러나 야고보에게 행위는 벗은 자에게 입히고 굶주린 자를 먹이는 것처럼 믿음에 순종하는 사랑의 행위였으며(약 2:15-17), 아브라함의 믿음과 친밀하게 제휴하는 것이요(약 2:22)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순종하며(약 2:21), 하나님의 사자를 보호하는 것이었다(약 2:25). 따라서 바울에게 믿음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한 신뢰요 전적인 의존이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메마른 지적 신앙인들을 향해서 그의 본문을 썼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나 사랑이나 순종이 없었다. 두 사도는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독자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수신자가 누구였는지를 살핌이 없이 바울과 야고보의 사상과 신학은 모순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여기 신앙이나 행위란 말이 성경에서 결코 한가지 의미로만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 신앙은 종교도 되고 신뢰도 되며 충성도 되고 헌신도 된다. 다만 이 낱말들이 문장 속에 들어가 쓰일 때 그 문맥에 따라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 바울의 신앙과 행위와 야고보의 신앙과 행위는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여기서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한 믿음과 행위에 관하여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예로 들어보자! 믿음에 대해서 바울은 순종하는 신뢰요(롬 1:5), 아브라함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롬 4:9, 16). 그것은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믿음이요(롬 10:9), 권징을 포함한 믿음이며(고후 5:7), 성령의 은사를 동반한 믿음이다(갈 3:2, 14). 이에 비해 야고보에게 믿음은 좀 다르다. 그것은 행위를 수반하는 믿음이요(약 2:14), 형제의 궁핍을 보고 응해 주는 믿음이다(약 2:15-17).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행실을 등한히 하는 지적인 수긍은 귀신에게도 있는 신앙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행위는 구원을 벌거나 공로를 위해서 계율적으로 행한 자기 의의 행위였고 야고보에게는 이미 구원 신앙을 체험한 신자에 의해 행해진 친절한 사랑의 행위였다.2) 그러므로 두 사람은 믿음과 행위를 각각 다른 견지에서 보았으며 그 의미도 서로 달랐다. 그러나 위의 본문을 떠나서 실제로 두 사도가 이해한 진정한 신앙에는 차이가 없었다. 앞서 보았듯이 바울에게도 신앙은 순종하는 신뢰요(롬 1:5), 아브라함의 것과 같은 신앙이었다(롬4:9, 16). 야고보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가 여기서 유대의 전통에 집착해서 행위의 구원을 주장하는 듯이 보이나 신앙 없는 행위가 아니라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강조하는 것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과 행위는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행위에서 분리된 신앙은 결코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3) 여기서 아브라함에 의한 행위는 야고보 사도에 의하면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친절이요 자비의 행위였다. 다시 말해서 그의 아들 이삭을 희생시키려는 준비된 자세가 그의 신앙을 증명해 주며 순종의 기본 관계를 드러낸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그의 아들 이삭에 대한 그의 음성을 순종한 신앙으로 의를 얻게 되었다. 그는 또 그의 행위로 의로워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신뢰와 순종이 그로 하여금 이삭을 희생하도록 무엇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도 믿음만이 의롭게 하나 의롭게 하는 믿음은 홀로가 아니라 하였다.4) 결국 바울과 야고보의 차이는 행위와 개종의 연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개종 전 행위의 어떤 효과도 부인하였다. 그러나 야고보는 개종 후 행위의 절대적 필요성을 변호했다.5)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의 행위나 공로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마땅히 구원받은 자답게 선행이 그 구원의 증거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바울과 야고보 사도 사이에 사상과 신학의 모순은 없었으며 두 사도가 다 복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주 1. Everett F. Harrison, Romans(E.B.C. Vol. 10), p.47 2. R.H. Stein, Difficult Passages in the Epistles, pp.33-35 3. S.J. Kistemaker, James(Baker Book House, 1986), p.98 4. James Adamson, The Epistle of James(Eerdmans, 1979), pp.132-133 5. Douglas J. Moo, James(IVP, 1988), p.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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