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유 9절) 문제가 되고 있는 구절은 유다서 9절과 14절이다. 전후의 문맥을 보면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죽은 모세의 시체를 이스라엘 백성이 미신적으로 사용할 것을 우려하셔서 그것을 숨기시려고 하실 때 마귀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 같다. 그러나 그때에 천사장 미가엘은 마귀를 직접 꾸짖지 않고 하나님께서 너를 꾸짖으시리라고만 하였다. 천사장 미가엘도 마귀를 판결하는 권위는 하나님께 맡겼던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거짓 스승들이 어찌 합법적인 권위를 무시하고 공박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다는 본문을 영감된 성경 말씀이 아닌 모세의 승천(The Assumption of Moses)에서 빌어왔다는 데 있다. 이것은 교부 중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와 오리겐(Origen) 그리고 디디무스(Didymus)등이 주장하였다. 물론 미가엘과 마귀에 대한 언급은 원본에서 상실되었으나 하가딕 미드라쉬(Haggadic Midrash)에 보존되어 있는 듯하며 이런 단편들에 따르면 마귀는 모세를 욕하면서 애굽의 감독자를 죽인 살인자로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 유다는 그것을 그의 유추를 위한 열쇠로 사용하였다. 거짓 스승의 비난은 마귀의 것과 병행하며 그들에 의해 여기서 합법적으로 세워진 권위를 대표하는 비난받은 고위 성직자들은 모세와 비교되었다고 본다.1) 그런데 천사장이 마귀를 직접 정죄하지 않은 것은 마귀가 모세를 살인자로 정죄하였으나 천사장 미가엘은 그것이 사실이었으므로 그 자신의 권위로 그의 고발을 기각시키지 않고 그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을 것으로 본다.2) 그 다음의 문제는 14절로서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란 말씀이다. 이 구절이 소위 구약성경의 가경 중에 하나인 에녹일서에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를 삼는 이들은 여기서 유다는 에녹서를 영감된 것으로 간주한 것은 물론 에녹일서는 구약의 선지서보다 그 수준에서 더 높은 위치에 두었다는 것이다.3) 그러나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유다는 구약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에녹의 예언을 인정하였다. 그 이유는 에녹이 모세의 오경을 쓰기 훨씬 이전 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다가 본문을 쓰는 목적은 그의 독자들이 에녹의 예언을 위해서 구약성경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음을 깨우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만일 유다서의 저자가 본문들을(9절, 14절) 성경이 아닌 영감되지 않은 책에서 빌어왔다면 과연 그 말이 정경이 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오류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두 책이 유사하다(유다서와 모세의 승천). 그러나 유다가 가경 문구에 의존한 것이 아니고 독립적으로 성령의 인도에 의하여 재래 유대인의 전통에서 그 이야기를 섭취했으리라고 보았다.5) 더 나아가서 두 고대의 글들이 유사하거나 심지어 동일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한 저자가 다른 저자나 혹은 다른 저자의 인용에서 복사한 것이라고는 증명하지 못한다. 아무도 유다가 모세의 승천이란 책을 보았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6) 그러나 메이어(Mayor)는 모세의 승천의 저자는 스가랴서에서 이 말을 취해 와서 천사장 미가엘의 입에 붙였다고 보았고, 비그(Bigg)는 본문 14절은 에녹서 1:9에서부터 복합적으로 이룩된 말씀이라고 보았다.7) 설사 유다가 모세의 승천기나 에녹서에서 본문을 빌어왔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본문의 권위를 낮추는가? 그것이 본문의 무오성을 훼손시키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이 다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거나 신학적 가치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에녹서나 모세의 승천기란 자경 안에도 부분적으로 진리는 있다. 바울은 사도행전 17:28에서 아덴의 청중들에게 설교할 때 아라터스의 파에노메나(Phaenomena) 5에서 인용함으로 이교도의 작품에도 진리의 부분이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가 성령의 인도 아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영감되지 못한 원천들에서도 진리의 부분을 선별해서 인용할 수 있는 것이다.8) 이제 마지막으로 이 문제에 대해 정리하기로 한다. 이 문제는 성경 저자의 영감으로 이해되고 해소된다. 성경의 저자들은 영감되었다. 모든 진리는 인도함을 받았을 것이며 진리에서 지켜지고 오류, 거짓, 전설 그리고 그와 같은 데서 보존되었다. 영감의 기능은 사실을 공급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시의 기능이다. 영감은 오류를 방지하며 우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이 진리임을 확신케 한다. 그 내용이 어디서 온 것이든 어떻게 영감 된 저자가 그의 정보를 얻었던지 성령은 저자로 하여금 참된 것을 가려내며 정확하게 참된 진리만을 소개하도록 능력을 주신다. 이것이 여기서 참된 요점이다.9) 유다는 여기서 그들이 이미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그들에게 말씀하였으며 그것은 기독교 진리의 전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에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성경 내용의 어느 부분이 다른 작품 속에 들어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작품 속에 어떤 일부의 내용이 진리의 증명을 위해 성경의 인용 부분에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주 1. Boreicke, The Epistles of James, Peter and Jude, Doubleday, 1964, p.202 2. Michael Green, 2 Peter and Jude, IVP, 1989. p.184 3. Boreicke, Op. cit., p.210 4. R.C.H. Lenski, I and II Epistles of Peter, The Epistles of John and the Epistle of Jude, p.639 5. 박윤선, 히브리서, 공동서신(서울: 영음사, 1973), p.414 6. Ibid., p.629 7. A.T. Robertson, 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Vol.IV, Baker, 1931. p.192 8. G.L. Archer, Op. cit., p.430 9. R.C.H. Lenski, Op. cit., p.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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