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의인이 아니고 죄인인가?
RevSuh  2008-08-12 12:19:26 hit: 1,486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17)

교회가 설립되면서부터 전파된 복음이나 신약 속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무엇보다도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말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만 아니라 국법이나 그 사회의 도덕법을 따라 살지 못한 의미에서 죄인들이란 뜻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나 사역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상은 신구약 성경에 풍부하다(사 1:18; 45:22; 55:1, 6, 7; 렘 35:15; 겔 18:23; 33:11; 호 6:1; 11:8;  롬 8:23-24; 고후 5:20; 계 3:20; 22:17). 그리고 구체적으로 주님은 죄인, 잃어버린 자, 길 잃은 자, 거지, 짐진 자, 배고프고 목마른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마 5:6; 11:28-30; 22:9-10; 눅 14:21-23; 15:9-10; 요 17:17-18).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실 이 말씀은 위대한 복음의 본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이 죄인 구원 사명과 사역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으셨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고,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인들과의 각별한 교제는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비난과 오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를 가득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으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이것을 바라보던 바리새인은 아주 못마땅해 하면서 이렇게 불평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 인줄을 알았으리라"(눅 7:38-39).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이 여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아셨기 때문에 그녀의 눈물의 봉사를 제지하지 않으신 것이다.
  
메시아의 죄인 구원의 대한 위대한 사명에 대한 무지때문에 예수님은 점점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죄인의 친구'란 별명이 붙게 되었고 예수님 자신도 사람들이 당신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부르고 있음을 아셨다(눅 7:34).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존경을 받지 못하는 점에서 창기와 한 그룹에 속하는 제일 천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의 집에 초대를 받으시고 함께 식사를 나누셨다. 왜 그랬을까? 당신도 그들과 같은 한 부류의 죄인이어서였는가?
  
본문은 세리와 함께 먹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비난한데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을 의사로, 세리와 죄인을 병든 자로 말씀하고 있다. 구약은 출애굽기 15:26에서 나(하나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사이시다. 그는 죄로 병든 영혼을 치료하실 능력이 있으시며 치료제를 잘 알고 계신다.1)  바리새인들도 세리와 죄인은 병든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의사가 환자를 고치려 하면 그는 병든 자가 아니지만 그 환자에게 가까이 가서 함께 있어야 하듯이 나도 죄로 병든 영혼들과 접촉을 해야 저들을 고쳐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그러니 의사인 나 예수는 이런 세리와 죄인(너희들이 병자로 보는)을 고쳐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2)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  본문 말씀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 기록자들이 한결같이 다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는 호세아 6:6을 인용했고 누가는 본문에 더해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하였다. 여기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죄인과의 교제 때문에 비난하나 나의 사명은 바로 이런 사람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이다. 회개는 먼저 죄를 전제로 한다.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하라고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개가 필요치 않으며 없는 죄는 회개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3)
  
여기 부른다는 말은 초청한다는 말로 잔치에 초대를 의미하는데 특별히 그 나라(천국)의 잔치에 초대함을 의미한다.4)  그러니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하늘 아버지의 자비를 얻고 즐길 수 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신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알고 이 초대에 응하여 회개하고 주를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여기서 회개는 행위의 개선이기 보다 성품의 변화요, 그러기에 예수님은 단지 병의 징후(Symptom)가 아니라 질병의 근원을 취급하신 것이다.5) 그러면 자신들을 의인으로 자처한 바리새인들은 정말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들이었는가?  여기 의인이란(디카이오이) 말은 언제나 법정적인 용어다.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의 희생을 인해서 그를 믿는 자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하시고 방면시킴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재판자리를 취하여 죄수가 자기는 무죄라고 우기듯이 의롭다고 선언하였다.6)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했던 바리새인들은 세리보다 더 심한 죄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면서 죄인인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죄인이지만 죄인인 사실을 깨달은 세리와 죄인들보다도 더 중한 죄인이었다. 저들은 정말 소경이었다. 복음은 죄인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죄인으로 보고 겸손히 그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자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교만과 자칭 의 때문에 예수님도 바로 볼 수 없었고 자신들을 옳게 보는데도 실패하고 말았다.

   주
   1. R.C.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Mark's Gospel(Augusburg, 1961), p.118
   2. W. Hendriksen, The Gospel of Mark(The Banner of Truth Trust, 1976), p.97
   3. J.A. Alexander, A Commentary on the  Gospel of Mark(Banner, 1960), p.44
   4. A.B. Bruce,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Vol.I( Eerdmans, 1976), p.353
   5. F.F. Bruce, Op,cit., p.31
   6. Lenski, Op,cit., p.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