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바울 사도는 이 구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마 5:4). 바울의 명령처럼 항상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저절로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항상 기뻐하기는 불가능하다. 누구도 그런 환경을 타고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여기 기뻐하라고 명령한 바울은 그의 과거의 죄들을 기억하고 있었고(빌 3:6; 참고, 갈 1:13; 고전 15:9) 그의 친구들은 실제로 고통을 당했으며(빌 1:29-30) 그 자신은 죄수로 죽음에 직면해 있기까지 했지만 기뻐했고 기뻐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는 주 안에서 기뻐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의 성령의 열매의 기쁨과 그리스도와 그의 하나됨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다(갈 5:22).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를 통해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믿음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다(롬 8:28).1) 주와 하나됨의 신앙은 죽어도 주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죽음도 얻는 것이 될 수 있었다(1:21, 23). 그러면 애통과 기쁨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왜 애통과 기쁨이 축복이 되는가? 기뻐하고 애통하는 것은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애통은 조건이요 기뻐함은 하나님과의 적절한 관계의 결과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참된 슬픔은 구원의 결과인 기쁨에 앞선다.2) 따라서 결과적으로 보면 기쁨만 아니라 애통도 축복이 된다. 다만 애통과 기쁨은 동시에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축복이면서도 순서적으로 선후가 있다. 먼저 애통하는 자만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애통이 기쁨의 조건이라면 애통이 축복임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주 1. William Hendriksen, Philippians, p.193 2. 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When Critics Ask(Victor Books, 1992), p.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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