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거룩한 성을 42개월 짓밟으리라
RevSuh  2008-08-18 10:32:09 hit: 1,676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계 11:2-3)

요한계시록에는 이상한 인격과 상징 그리고 환상으로 우리의 이해를 어렵게 하지만 어떤 숫자 역시 그 해석이 용이하지 않다. 본문도 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학자들간에 그들의 종말관의 차이로 본문은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이 본문에서 성전 밖 마당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거룩한 성을 42개월 동안 짓밟는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1,260일을 예언하는 이 증인들은 누구인가?  이 시기는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
  
먼저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라는 구절부터 생각해 보자.
성전의 외뜰은 이방인들의 뜰이었다. 솔로몬의 성전은 두 뜰이 있었으며(왕상 6:36) 헤롯 성전의 안은 세 뜰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그리고 제사장의 뜰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이방인이든지 그들의 경내를 벗어나 안으로 들어오면 죽임을 당했다(Josephus, Bell, V,5, 2, 엡 2:14).
  
성전 밖 마당은 발람(계 2:14), 이세벨(계 2:20)을 따르는 자 같은 고백교회의 회원들에 대한 상징이다. 그러나 참 교회는 짐승의 표를 거절한 사람들로(13:7, 16-17) 고난 중에서 그들의 신앙을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1)  이곳의 외뜰은 이방인에게 짓밟힌 곳으로(2절) 하나님의 하늘의 성전이 아니라 지상의 성전이다. 그러면 다시 재건될 예루살렘의 성전이냐 그렇지 않으면 상징적으로 언약 백성이냐? 성전이란 말이 복음서에서는 한 곳(요 2:19-21)만 제외하고 항상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켰다. 복음서에서 밖은 이방인의 성소를 가리켰거나(행 17:24; 19:24) 바울 서신에서 비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육신적 몸들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켰다(고전 3:16; 고후 6:16; 엡 2:21). 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공동체는 이방인과 불신자도 섞여 있어서 순수하지 못하며 진실하지 못하다(계 21:8; 22:15). 그런데 이방인(이교도)도 성전의 외뜰은 접근이 허용되며 제한된 기간(42개월)동안 거룩한 성을 짓밟도록 허용될 것이다.2)
  
물론 문자적으로 장래의 환란 동안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으나(Walvoord) 일반적으로 상징적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다음으로 42개월은 어떤 기간을 가리키는가?
여기 42개월(계 11:2; 13:5)은 역시 1,260일로 소개된다(계 11:3; 12:6). 또 한 때, 두 때 그리고 반 때로 말씀한다(계 12:14). 이 기간은 주로 주전 167-184년에 있었던 수리아의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아래서 유대인들이 고난을 당한 시기를 가리킨다. 이 기간은 악이 자유롭게 다스릴 수 있도록 허용된 제한된 시기에 대한 전통적인 상징이다. 누가복음 21:24에서는 이방인의 때로 불렀으며 요한계시록에서는 다양한 명칭으로 나오는데 마지막 증거, 하나님의 보호 그리고 이교적 적대가 동시에 있을 기간을 지적하는데 쓰였다.3)
  
이 기간은 다니엘서에서 이방인에 의해서 거룩한 성이 짓밟히도록 허용된 기간이요 두 증인들의 예언의 시기이며 짐승이 권위를 행사하는 기간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의 독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시련은 측정할 수 있는 제한된 기간이며 그들은 그 환난에서 구원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별하게 하려 하였다. 역시 42라는 수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진을 쳤던 수이기도 하다(민 33:5).4)
  
마지막으로 1,260일을 예언할 두 증인은 누구인가?
두 증인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1. 두 역사적 인물이 부활할 것이다.  두 그룹을 가리키거나 두 원리 예컨대 율법과 선지자들이다.
   2. 에녹과 엘리야다(Tertullian, 220년에 죽음).
   3. 모세와 엘리야가 돌아 올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의 전통인데 여러 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한다.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낸다면 너희가 함께 가        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Jochancan Ben Zukkai(제1세기); Charles). 그들은 장래에 모세와 엘리야의 기능을 수행할 두 선지자다
      (Beckwith)
   4. 교회를 가리킨다(Primasius).
   5. 교회의 충성과 제사장직 기능을 상징한다(Bruce, Caird).
   6. 기독교의 선지자 베드로와 바울이다(Munck).
   7. 교회 안에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다(Mathias, Rissi).
   8. 모든 선지자들의 두 대표를 가리킨다(Minear).

그런데 이 모든 해석 중에서 분명한 것은 어느 개인 두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존슨(Alan Johnson)은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네 가지로 들었다.

   1. 그들이 결코 개인들로 보이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함께 한다. 예컨대 예언을 함께 하며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며 함께 승천한다. 이것은 그들이          두 사람일 것으로 보기 어렵다.
   2. 짐승이 그들에게 전쟁을 건다(7절). 만일 그들이 두 사람이라면 이상하다.
   3.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들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본다(9절). 만일 두 개인이 관계된 것이라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어떤 것이다.
   4. 그들은 두 촛대로 설명했다(4절). 그것은 제1장과 2장에서 많은 개인들을 포함하는 지역 교회에 적용되었다.5)

이런 맥락에서 말세의 교회로 보는 것이 무리 없는 해석으로 여겨진다. 저들이 베옷을 입은 것은 그들이 처한 환경이 시련과 슬픔, 위험, 위기 그리고 천박한 때를 살면서 회개를 외쳐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말세 교회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베옷을 입고 회개를 외치는 일이다. 이 사명을 위해 죽을 수 있을 때 그 교회(신자)는 부활과 승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주
   1. Robert H. Mounce, The Book of Revelation,  p.220
   2. Alan F. Johnson, Revelation(E.B.C. Vol. 12),  pp.500-501
   3. Robert H. Mounce, Op. cit.,  p.221
   4. Leon Morris, Revelation,  p.143
   5. Alan F. Johnson, Op. cit.,  p.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