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전 2:24)
위의 구절 때문에 전도서가 쾌락주의를 추천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그것은 쾌락주의의 철학이 먹고 마시고 결혼하라 왜냐하면 한번 온 인생은 이제 죽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쾌락주의를 정죄하고 있다(눅 12:19-20; 고전 10:7). 그러면 위의 구절이 과연 쾌락주의를 추천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구절은 쾌락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이 구절의 의미를 바로 파악한다면 그런 오해나 문제는 쉽게 풀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전도자는 생의 즐거움을 조언한다. 그러나 먹고 즐기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는 말도 엄격하게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생의 목적이 마치도 음식과 소유를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사람이 노동과 노동의 결실에 관하여 인생을 조망해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그러므로 그는 높은 가치에 대한 귀중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그들의 노동에서 얻는 보상을 즐기기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로 생을 즐기고 생의 선한 것들을 사용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1). 여기서 먹고 마심과 그 즐거움은 선한 삶에 대한 상징이다(R. Smend). 그러나 생의 쾌락을 궁극적 선으로 말씀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선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관대하심의 이유로서만 그렇다는 것이다(2). 따라서 하나님이 없고 내세가 없는 현생에서의 쾌락을 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쾌락주의와 여기 전도자가 말씀하고 있는 생의 즐거움은 전혀 다른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도덕적 선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기능적인 행위 즉 생의 행로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최선한 길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3). 그러므로 어리석은 부자가 되기를 추천하지 않고 방종이나 회의주의를 추천하지도 않는다. 다만 만족하기를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의 구절이 신약에도 있다(딤전 4:4; 6:6-8). 이 구절의 요점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신다. 따라서 참다운 기쁨과 만족 그리고 즐거운 삶을 살려면 그 모든 원천이 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26절에서 전도자는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죄인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게 되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발견한 것과 똑같은 생의 모든 면에서 기쁨을 발견할 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4). 그러므로 이 구절은 쾌락주의를 권장하거나 세속적이 되라고 조언하지도 않는다. 또 쾌락이 생의 목적이라고도 말씀하지 않는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므로 얻는 소득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알아 감사함으로 누리라는 것이다. 그것들이 다 하나님의 손에서 온 것이니 즐기되 오는 사후의 삶의 빛에서 그것을 누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을 즐길 수 있으나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줄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한다(전 11:9).
주 1. Duane A. Garrett, Proverbs, Ecclesiastes, Song of Songs(Nashville: Broadman,1993), p.296 2. Roland Murphy, Ecclesiastes(Dallas: Word, 1992), p.26 3. J. Stafford wright, Ecclesiastes, E. B. C. Vol.5.(Grand Rapids: Zondervan, 1991),p.116 4. Qalter C. Kaiser, Jr.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88), pp.186-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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