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호 13:14)    
      
위의 말씀은 구약에 기록된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약속들 중에 하나이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위의 구절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헬라어의 70인 역본에까지 번역 성경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여러 역본들은 의문사로 시작하는 번역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개정표준역 (RSV)에서는 내가 죽음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인가?  오 죽음아!  네 병이 어디 있느냐고 하였다.  그 밖에 새영어성경과 현대영어번역 성경(TEV)에서도 모두 의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우 그 대답은 부정적인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구절이 정말 축복을 말씀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하고 있느냐는 판단은 그리 쉽지가 않다.
  
위에서 보았듯이 만일 첫 네 말이 선언적인 언급이라면(I shall be, or the Like), 협박의 말씀이기보다 부분적으로 약속의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첫 네 말씀이 의문으로 번역되는 것이 최상의 번역처럼 보이며(14 상반절) 또 전체 문맥이 심판들에 대한 것이므로 질병과 재난은 신명기 32:24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때 그런 말에 소망을 부여하기는 어렵다.1).  이렇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성경과 학자들도 꾀 많다(RSV, NEB, JB. Ward, Walff, Jeremias, Jacob).
  
이에 비해 위의 구절을 긍정적으로 축복과 소망으로 보는 번역들로는 새미국표준성경(NASB)과 새국제역(NIV)이 있다.  이 번역들은 우리말 성경처럼 내가 속량하고 내가 구속하겠다로 번역하고 있다.
  
위 구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사망아 나는 네 병이 될 것이며, 음부야 나는 네 멸망이 될 것이다 가 된다.2) 그런데 이 장의 4-11절까지에서 화자는 하나님이시며 이 구절을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호세아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께서 죽음과 무덤의 지배에서 속량하시고 구속하시겠다고 단언하시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주님은 죄 많은 인류에서 자유하신 분이시므로 속량으로 전 율법을 이루셨고(마 3:15), 죄과를 옮기셨으며(요 1:29), 사람의 죄의 모든 형벌을 당하심으로 공의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에 완전히 만족케 하시었다.  속량은 가장 가까운 친척의 의무였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의 기쁨은(잠 8:23-30) 사람의 아들들과 함께 사시는 것이다(31절).  그래서 여인의 후손이 되시었고(창 3:15) 모든 산 자의 어미 이브의 후손으로 그들의 육신을 입으시고(히 2:14-18), 그들의 형제가 되시므로(히 2:11) 그들의 친척이시며 그들의 속량자가 되시었다(욥 19:25).
  
따라서 여기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무덤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은 내가 네 병이 되고 내가 네 멸망이 되겠다는 뜻이 된다.3)  다시 말해서 대속을 위한 희생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번역할 수 있는가?   정상적으로 허용되는 번역은 내가 되겠다는 제이 인칭이나 삼인칭 대명사들의 형태(you, he/she)에 제한된다.  그러나 제일 인칭 히브리 명령을 나타내는 형이 어떤 예외적인 경우에 나오고 있다.4)  그러므로 내가 되겠다는 번역이 불가능하지 않다.  이 해석에 물론 또 다른 문제가 있기는 하다.  어느 학자들의 주장에서처럼 위의 문맥은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나 7-13절과 15-16절의 심판과 저주 사이에 들어 있는 14절의 문제는 창세기 3:8-19에서도 같은 상황을 엿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율법과 저주 사이에 15절의 첫 복음이 뒤이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 복음 후에 율법주의 저주가 따라온다(16-19절).  더 나아가서 이 해석은 신약의 고린도전서 15:54-55에서 말세에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신자들의 생명의 부활에서 죽음의 정복자 되실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바울에 의해서 지지받고 있다.  만일 위 구절이 파멸을 가리켰다면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쓴 바울의 죽음과 지옥을 이긴 승리의 노래에 맞지 않는다.5)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내 뉘우침이 네 목전에서 숨으리라고 단언하실 수 있으셨다.  그 뜻은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약같은 말씀이다.6)
  
이렇게 볼 때 호세아 13장의 문맥은 이스라엘의 지상 심판과 연관이 있으며 14절 하반절의 다른 면은 장래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위 구절이 언급한 바를 행하시는 그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7)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롬 11:28).  그리고 이렇게 볼 때 14절의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는 결코 서로 모순이 없으며 14절 후반부는 14절 전반부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속하시는 그 위험성의 목록이라고 볼 수 있다.8)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보아야 옳다.


1. Douglas Stuart, Hosea - Jonah(Waco: Word, 1987), p.207
2. 김희보, 호세아(서울: 총신대출판부, 1992), p.395
3. Theodore Luetsch, Minor prophets(St. Louis: Concordia, 1975), p.104
4. Walter C. Kaiser, Jr.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 Grove: IVP, 1989), p.221
5. Theodore Luetsch, Op.cit., p.106
6. 김희보, 상게서, p.397
7. Leon J. Wood, Hosea(Grand Rapids: Zondervan, 1985), p.222
8. Francis I. Andersen and David Noel Freedman, Hosea(Garden City: Doubleday, 1986), p.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