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호 11:8-9)
하나님께서는 이미 평원의 다섯 성읍 -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바 - 들을 멸망시키셨듯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엄격한 심판을 하시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며 범죄하는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민족에 대해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은 상당히 구약에 많다. 이사야 31:3에는 악행자의 집에 재앙을 내리신다 하였고 사무엘상 5:29에는 범죄자를 심판하심에서 결코 변치 않으신다 하였다. 모세의 오경에는 지속적인 불순종은 죽음과 멸망뿐 일 것임을 말씀하는 구절들이 많다(레 26:38; 신 4:26; 28:20-22; 신 30:19; 신 32:26). 따라서 여기 호세아 11:8-9은 예상 밖의 말씀이요 위에 언급된 구절들과는 사실상 조화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맞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호세아 6:4과 11:8은 하나님이 일관성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죄에 대해 자동적이 아니었다.1)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모순을 조화시킬 수 있는가?
여기서 호세아가 이스라엘을 위한 새로운 소망으로 심판에서 회복을 말씀하는데는 두 가지 근거가 있었다.
(1) 이스라엘은 성실하지 못했으므로 충분한 심판의 고통을 받을 것이며 앗수르의 정복아래 포로가 되었다.
(2) 하나님의 속성은 동전의 면 같아서 두 면이 있으시다: 심판과 사랑(동정)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자유롭게 포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은혜와 사랑(동정)의 속성 아래서 취급하실 수 있으시다. 그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오류와 예측 불허나 우유부단함 그리고 방자함에서 구별되신다. 하나님의 결정은 그의 거룩하심 때문에 생각의 품질과 도덕적 행위에서 인간과는 다르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에브라임의 고집 셈과 이기적 배교 그리고 야웨의 주권적인 거룩과 은혜 사이에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죄 때문에 심판하시었으나 이제는 그의 사랑과 자비로 회복시키신다. 비록 그들이 아드마와 스보임의 운명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과거에 그가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는 그들을 포로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은혜는 죄의 부끄러운 결과들을 이길 능력이 있다. 이 계시는 이 구절을 우리 하나님의 자녀, 사랑 그리고 동정에 대한 위대한 본문의 하나로 만든다. 죄가 넘친 곳에 하나님의 은혜도 넘친다는 것이다.2)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거룩은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들은 신적 거룩의 역사로서 보여졌다(사 41:17-20).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심은 그 자체가 그 나라의 임함에서만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예비하시고 죄 용서를 약속하시며 시험에서 보호와 악한 자에게서 구원하심에서도 드러난다(마 6:9-13). 사도 바울은 그의 동료 신자들이 그들의 마음이 거룩에서 흠이 없기를 위해 기도하였다(살전 3:12-13).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의 사랑은 역시 거룩한 사랑이요 거룩을 사랑하는 사랑이신 것을 깨달았다(요일 4:10).3)
더 나아가서 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은 우리의 구원에서도 공의의 사랑으로 잘 나타났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공의가 다 그의 법을 이루는데 필요했다(갈 4:4-5).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그에게서 죄가 옮겨져야 하는데(사 53:6; 고후 5:21) 이를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게 되었다(요일 2:2). 그 아들의 죄인을 대신한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형벌의 공의를 만족케 하신 것이다(사 53:4, 5; 갈 3:13).4)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 공의를 희생하심이 없이 죄인을 구원하신 것이다.
이 구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모순되게 들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의 죄에 대해 의와 공의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다. 차라리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죄인된 저들을 회개하도록 이끄셔서 돌아오게 하실 수 있으시며 저들이 돌아올 때 그들의 심판에서 축복으로 저들의 운명을 바꾸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죄인의 운명이 심판에서 축복으로 회복될 때 변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에 모순되지 않는다.
주
1. Francis I. Andersen and David Noel Freedman, Hosea(Garden City: Doubleday, 1988), p. 590
2. Walter C. Kaiser, Jr. More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92), pp.250-251
3. David Allan Habbard, Hosea(Downers Grove: IVP, 1989), p.195
4. Theodore Laetsch, Minor Prophets(St. Louis: Cocordia, 1975), pp.9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