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수 6:21)
여기 여리고의 멸망에서 유아들이나 짐승까지 다 죽인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설사 여리고성이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하자 또 우상을 섬겼다고 하자. 그러나 어린아이들과 짐승들이야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했는가? 이에 대해 매튜 폴(Mattew Poole)은 유아들도 원죄의 죄성이 있었으며 주권적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가 토기를 자기 뜻대로 만들어 쓰듯이 모든 사람의 생명에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만일 그들이 전적으로 무죄했다면 생존자들이 당해야 할 무서운 재난에서 생명이 보존되기보다 차라리 유아로서 죽는 것이 훨씬 더 은혜였으리라고 하였다⑴. 그런데 사실 여기 여리고의 멸망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사신(死神) 우상을 섬겼고 그들의 혐오스러운 관행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그들을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시킬 수 있었다⑵. 이런 견지에서 보면, 여리고의 완전한 멸망은 우리 몸에 암이 발생했을 때 의사는 그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암이 발생한 부분만 아니라 훨씬 더 넓은 부위까지 다 수술을 해 내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가이슬러(N. Geisler)는 아래 다섯 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변호하였다. 첫째로, 가나안 사람들은 무죄하지 않았다. 레위기 18장에 그들의 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 땅은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25절). 그들은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모든 종류의 혐오스러운 죄로 부도덕했고 더러워져 있었다(21, 24, 26절).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팔레스틴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사악을 회개하도록 400년 이상의 기회를 주셨다. 결국 그들의 죄는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기회를 죄를 더하는데 악용한 데 있었다. 셋째로, 어린아이들을 죽인 데 대해서는 몇 가지 사실이 사료되어야 한다.
1. 주어진 그 사회의 암적인 상태로 그들이 출생되었으므로 그들은 그 사회의 운명적인 오염을 피할 기회가 없었다 2. 아주 어려서 죽은 아이들은 천국에 갔을 것이다(삼하 12:23).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3. 하나님은 생명을 주관하신다(신 32:39; 욥 1:21). 그리고 그의 뜻에 따라서 그리고 피조물의 궁극적 선의 견지에서 생명의 종국도 명령하실 수 있으시다.
넷째로,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자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여리고의 파괴는 이스라엘의 군대에 의해 수행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온 세상의 의로우신 재판자가 세우시고 의는 이런 백성들의 죄에 대한 심판의 도구였다⑶.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할 수 있다. 여리고의 완전한 멸망은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여리고의 파괴는 이스라엘이 자의로 행한 것이 아니라 공의의 재판자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심판의 시행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해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느냐, 그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르냐라고 따질 수가 없다. 우리 자신도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참되시고 의로우시다.
주 1.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Vol.1(London: Banner,1968), p.418 2. Richard S. Hess, Joshua(Downers Grove: IVP, 1996), p.133 3. 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When Critics Ask(Victor Books, 1992), pp.137-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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