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수 6:1) 여호수아 6장은 여리고 시의 정복과 파괴에 대해 기록한다. 만일 이 설명이 정확하다면 현대 고고학적 발굴은 이 기념비적인 사건에 대한 증거를 뒤집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고고학적인 조사는 정말 여호수아의 설명이 정확하지 않음을 증명하는가? 수년간 비평적 학자들의 유력한 견해는 가나안의 중앙에 있었으리라고 보는 여호수아 시대의 여리고라는 도시는 없었다는 것이다. 비록 유명한 영국의 고고학자 케논(Kathleen Kenyon)은 고대 여리고 시의 존재와 그것의 급작스러운 파괴 그리고 그녀의 발견물들은 그녀로 하여금 그 도시가 주전 1550년 보다 늦지 않게 존재했으리란 결론을 했었다. 그러나 이 연대는 여호수아를 위해서는 너무 이르다는 것이다. 또 여리고성은 사실상 큰 성읍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텔에스-술탄(Telles-Sulton)은 청동시대의 위치와 철기시대 여리고는 광대한 오아시스를 지배했으나 성경적 시대에서는 어느 때도 큰 도시가 아니었다. 단지 8.5 에이커의 크기였다. 큰 도시는 20에이커 정도였으며 인구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중간 크기의 도시는 수백에서 수천 명의 인구가 있었다⑴. 그러면 과연 여호수아의 설명은 부정확한 것인가? 이에 대해 헤스(Richard S. Hess)는 여리고 사건을 아래와 같이 세 가지 견지에서 볼 것을 제의한다.
1. 성경적 본문은 여리고를 기브온이나(수 10:2) 하솔(11:10)과 같은 그런 중요 도시로 서술하지 않는다. 2. 여리고의 왕은 지역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이 말은 여호수아에서 전체를 통하여 도시나 마을들의 지도자를 설명하는데 쓰였다. 3. 성경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시 아래서 승리한 것을 강조한다⑵
더 나가서 초기 발견 물들에 대한 근래의 재조사와 더 가까이서 본 고대의 증거들은 거기에 성경적 연대에 부합된 한 도시가 있었을 뿐 아니라 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의 파괴에 대해서도 성경적 설명과 일치한다. 성서 고고학 개관지(Biblical Archaeology Review, 3월, 4월 초 1990)에서 토론토 대학교에서 근동 연구부의 방문 교수로 있는 우드(Bryant G. Wood) 는 성경적 보고가 정확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상세한 조사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하게 하였다.
1. 이 장소에 한번 위치했던 그 도시는 강력하게 요새화 되었으며 여호수아 2:5, 7, 15; 16:5, 20에 있는 성경적 기록에 일치한다. 2. 그 멸망은 그 시가 봄의 추수 후 공격이었다는 증거를 주는데 여호수아 2:6; 3:15; 5:10에 일치한다. 3. 여호수아 6:1에 기록된 대로 그 주민들은 침공한 군인들에게서 그들의 식량을 가지고 도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4. 그 성의 포위는 여호수아 6:15에서 기록된 대로 그 주민들로 그 성안에 저장되었던 양식을 다 소비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5. 그 성벽들은 여호수아 6:20에 기록된 것처럼 침략자들에게 그 성안으로 접근을 예비해 주는 길에 수평했다. 6. 그 도시는 여호수아 6:17-18에서 하나님의 지시대로 침략자들에 의해 약탈되지 않았다. 7. 그 도시는 여호수아 6:24이 말씀하는 것과 꼭 같이 그 성벽이 무너진 후에 불에 탔다⑶.
이렇게 고고학적 발굴로 인한 발견 물들은 여호수아서의 기록이 정확했음을 증명해 주는 도구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고고학적 발굴은 성경대로 여리고성의 정복이 정확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주 1. Robert G.Boling and G. Ernest Wright, Joshua(New York: Doubleday, 1988), p.205 2. Richards S. Hess, Joshua(Downers Grove: IVP, 1996), p.138 3. 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When Critics Ask(Victor Books, 1992), p.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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