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라
RevSuh  2008-08-05 15:46:47 hit: 1,8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말 1:11)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하다.  선지자 하박국 당시에 불완전한 제사가(7-8절) 장래에 있을 예배의 순수한 제물과 대조되었다(사 2:2-4; 66:19-21; 슥 14:16-21).  따라서 위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신약 시대에 와서 성취되리라는 것이다.1)
  
그런데 학자들은 11절이 구약 해석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것은 본문이 문법상 불완전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내 이름이(is) 민족 가운데서 크다는 표현은 동사가 없이 이 구절에서 두 번 나온다.  또 접속사 그리고(and)가 깨끗한 제물 앞에 빠져 있다.
  
다른 문제는 1:11이 그 문맥과 연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11절은 1:2-5과 모순되며 12-14절과 함께 후대에 덧붙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F. Horst, K. Elliger).  그러나 매슨(Rex Mason)은 전체 말씀이 두 부분 6-11절과 12-14절로 나뉘는데 각각 제사장들에 대한 비난의 비슷한 언급들이 서로 닮았다.  이런 반복은 어쩌면 강조를 위한 것이었으리라 보았다.2)  
  
그 밖에 이 구절의 해석상에 문제는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라는 표현이 지역상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것이냐는 것이다. 그 말이 넓은 지역이긴 하지만 제한적이냐 그렇지 않으면 보편적이냐는 것이다.  이 경우에 민족 중에서라는 말(baggoyim)이 과연 민족들에 관하여 라는 것인가 혹은 민족들 가운데 서란 말인가에 따라서 깨끗한 예물을 드릴 자가 누구냐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또 히브리 수동분사 마가스(Maggas)가 미래시제냐(will be brought, KJV. NASB, NIV) 혹은 현재분사로 보느냐(is brought, RSV)에 따라서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하반절에 일치하게 해석되어야 하므로 미래 시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제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리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자.
이 구절에 대한 해석도 다양한데 간략하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 이 구절이 미사에 대한 예언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다.  이것은 초기 로마캐토릭의 견해로 말라기 1:11의 깨끗한 제물(제사)을 미사 교리에 대한 중요한 증거 본문으로 보았다(Carroll Stuhlmueller).  이 구절이 유대인의 희생 제사와 다른 메시아 시대에 있을 어떤 새로운 예배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나 이 본문이 기록되던 때에 그것이 로마 캐토릭의 미사를 의미했다고는 볼 수 없다.
  
2. 흩어진 유대인들로 보는 견해가 있다. 민수기 13:4의 미드라쉬라바(The Midrash Rabbah)는 말라기 1:11을 흩어진 유대인들의 기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말라기 1:11에 근거한 바벨론 탈무드의 한 주석은 율법의 연구를 가리켰다.  따라서 이 구절은 흩어진 유대인들의 제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말라기 시대에 페루시아에서 남부 애굽에까지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애굽에 유대 인의 공동체는 엘레판틴(Elephantine)에 있었다. 그 예배는 혼합주의적 특성을 지녔으므로(S.J. Sxhwantes) 깨끗한 제물로 불려질 수 없었다.3) 그들의 예배는 정통이 아니었다. 내 이름이 민족 중에서 크게 되리라는 것은 본국을 떠나 정해진 몇 몇 지역에 살던 유대인에 제한시킬 수 없다.
  
3. 1:11은 모든 종교에 있는 최고 하나님의 경배에 대한 혼합주의적 견해를 가리킨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고 이 견해가 지난 수백 년간 해석자들의 다수에 의해 취해진 것은 사실이었다(J.M.P. Smith, Hitzig, Wllhausen, C.C.Torrey, Nowack, Marti, Chief Rabbig, H. Hertz, Rabbi Eli Cashdan, R.H. Pfciffer and R.C. Dentan)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교의 제사를 인정하신 일이 없으며, 그 증거로는 가멜 산상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엘리야의 대결을 들을 수 있다(왕상 18:19-46). 발드윈(Baldwin)은 더 나아가서 마지막 세 구절(말 3:22-24)들이 말라기서의 핵심 구절이라면, 그 선지자는 계속해서 한 분 참되신 하나님께 대해 배타적인 증거를 함으로서 그의 타협하지 않는 입장을 지속하고 있다(신 4:19 하반절; 29:26; 32:8-9).4)
  
4. 그 선지자는 어떤 이교 예배는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현재 음란한 예배보다 낫다고 이해했다는 추상적인 견해가 있다.  선지자는 여기서 과장법을 사용함으로 추상적으로 말씀했다는 것이다. 페이퍼(R.H. Pfeiffer)는 그들의 신들을 부드럽게 한 이교도들의 제물들이 그의 눈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오염된 제물들보다(1:11) 더 순수했다고 보았다.  브라우(Johnnes Blou)는 그 동사는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과 비교해서 이교도가 야외의 올바른 예배자들이었다(J. Blou, The missionary Nature of the Church, 142) 매티우스(I.G. Matthews)도 말라기는 그들의 예배에서 신실했던 이교도들이 더 큰 빛으로 조명을 얻은 유대인들의 무관심한 예배보다 야외께 더 받으실 만 했다고 보았다.  베넷(T.M. Bennett)은 선지자의 목적은 그의 예배에서 이교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같은 입장이다.  매슨(Mason) 역시 이교도의 예배는 창조주의 이름의 위대함을 인식하고 드린 감사였으므로 야외의 이름을 몰랐을지라도 그에게 보다 더 받으실 만 했다고 하였다.5)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성경의 어느 구절로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이런 제사는 결국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와 다를 바가 없다.
  
5. 임박한 종말론적 견해가 있다.
브리즌(T.C. Briezen)은 1:11을 민족들 중에서 이미 실현의 과정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계시의 임박함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하였다.  선지자는 3:1에서 볼 수 있듯이 야외의 임박한 오심을 위해 그의 백성을 예비시키도록 부름 받았다고 한다(Grace upon grace 132).  그의 결론은 1:11을 들어 말라기를 쿰란 공동체(Qumran)와 비교하고 있다.  모두 하나님의 나라의 가까움을 기대하며 살았고 모두 선택과 공동체의 사상을 강조했으며 모두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충돌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잘못이다.  스미스(Ralph L. Smith)가 잘 지적했듯이 말라기가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밖에 있는 세상에 개방적이었던데 비해 쿰란 공동체는 완전히 내향적인 닫혀진 공동체였다.6)

그럼에도 말라기서가 메시아 시대에 관해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이 아니라 온 땅의 신자들이며 제물을 가져온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어느 곳이나이기 때문이다. 발드윈(Joyce G. Baldwin)은 이 예언이 종말론적임을 이렇게 점차적으로 설명하였다.

1. 선지자는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될 것을 보려고 기대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가 그런 개종을 예시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시 2:2-4; 11:10; 참고, 42:6; 49:6; 55:3-5; 66:18-21). 그리고 에스겔은 빈번하게 그의 회복의 예언에서 민족들이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되리라고 반복하고 있다(겔 36:23; 37:28; 38:23; 39:7).
  
2. 말라기에서는 이 온 세계의 예배가 예루살렘에서 드려졌던 레위 제사에 의존되지 않을 것임을 예견함에 있어서 그의 선임자들보다 더 나아가고 있다(참고; 사66:18-21; 슥 14:21)
  
3. 그 문맥은 그 분사 드렸다(이 문장에서 표현된 유일한 동사)가 하나의 임박한 장래로서 이해되어져야함을 요구한다. 말라기가 그의 성전에 여호와의 급작스러운 강림을 기대한 것과 똑같이 그의 마음속에는 가치에 있어서나 효과에 있어서 모두 이전 제물을 능가하게 될 순순한 제물로 불완전한 제사들의 완성이 있었다.  제물을 드리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 있는 자들로 이 희생을 통하여 약속의 계약들에 이방인이었던 자들이 하나님께 화해하게 될 것이다(엡 2:11-22).7)

따라서 여기 분향하며 한 그 향은 하나님께 끝임 없이 올라가고 있는 성도들의 기도에 대해서 그것의 상징적 달콤한 향기와 함께 향단을 가리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8) 또 어떤 학자들은 여기에 제물은 찬양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참고, 히 13:15).9)
  
그러므로 말라기 1:11은 흩어진 유대인이나 또는 이방인 개종자에게 한한 구절이 아니다.  여기서는 민족이나 지역을 초월해서 세계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에게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을 예고하고 있다.

     주
     1. New Genva Study Bible(Nashville: Thomas Nelson, 1995), p.1488
     2. Ralph L. Smith, Micah-Malachi(Waco: Word, 1984), p.313
     3. Pieter A. Verhoef, Haggai and Malachi(Grand Rapids: Eerdmans, 1987), p.229
     4. Ralph L. Smith, Op.cit., p.314
     5. Ibid., pp.314-315
     6. Ibid., p.316
     7. Joyce G. Baldwin, Haggai, Zechariah, Malachi(Downers Grove: IVP 1972), p.230
     8. Walter C. Kaiser, Jr.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88), p.248
     9. The NIV Study Bible(Grove Rapids: Zondervan, 1985), p.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