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과 악인의 운명
RevSuh  2008-08-01 16:41:11 hit: 1,620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시 37:9)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 37:25-26)


위의 두 본문은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째는 악인이 끊어질 것이라(9절)는 것이요, 둘째는 의인의 후손은 결코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 문제 악인이 끊어진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알아보자.
본 시편 기자는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대조적으로 비교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뜻을 이 땅에서 실행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소망 중에 신뢰하는 온유한 자를 위함일 뿐이라고 한다(9절).  나라가 그들의 것이며(11절) 그들은 위대한 평화를 즐기게 된다.  평화는 고통스런 삶과는 대조적으로 경건한 성도의 은혜를 대변한다(참고, 72:7).  평화는 그의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참고, 롬 5:1).  그리고 그것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준다.  의인은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로서 땅을 차지할 것이라 한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교훈이 예수님에 의해서 반복되고 확대되었다(마 5:5).  그러나 악인의 운명은 끊어질 것이라 한다.
  
그러면 여기서 끊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멸절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끊어진다는 말은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과 시편 34:16에 의하면 땅에서부터 잘라 낸다는 뜻이다(1).  다시 말해서 악인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가나안 사람들처럼 결국은 잘려질 것이요 의인은 그들의 후손처럼 그 땅(가나안)을 상속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2).
  
우리말 표준 새번역에서는 이 말을 뿌리째 뽑힌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그 밖에서는 그들이 멸망하리라고 하였는데(시 73:27; 잠 21:28), 거기서 영원히 끊어진다, 잘려진다는 말을 멸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자는 영원히 멸절되리라는 것이다.  멸절이란 말은 라틴어 니힐(nihil)에서 왔는데 무(nothing)란 뜻으로 멸절을 주장하는 이들은 사람의 영혼이 사후에 존재를 그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후에도 인간의 영혼이 멸절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악한 자의 운명은 사망이며(롬 6:23; 약 5:20; 계 20:14 등) 파멸이요(마 7:13; 10:28; 살전 1:9 등) 멸망이다(요 3:16).  그러나 거기서 육신적 죽음은 차라리 영과 육의 분리를 가리킨다.  영적인 죽음이나 둘째 사망(계 20:14; 21:8)도 영혼이나 인격이 소멸된다는 뜻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에서의 격리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과 존재할 가치가 있는 기본 상태 즉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소격되는 것을 의미한다(3).
  
따라서 악인은 끊어진다, 잘린다는 말은 멸절되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보는 또 다른 이유는 메시아의 죽음에 사용 된 단어가 역시 카라트(karath)이므로 메시아가 죽었을 때 그 메시아는 멸절되고 말았어야 한다(단 9:20).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그리스도는 멸절되지 않았으며 그의 사후에도 영원히 살아 계신다(참고, 계 1:18; 살후 1:9 참조)(4).
  
이제 두 번째 문제를 다루기로 하자.
두 번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내용이다(37:31-32).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견고하게 하시며 보호하신다(23-24절). 그들을 위해 양식을 예비하시며(25-26절) 선을 행하는 의인을 사랑하시며 예비하신다(29절). 의인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에 지혜의 말을 한다(30-31절)(5). 그러나 이 본문에서처럼 의인은 버림받지 않으며 그 자손은 구걸하는 자가 없다는 말이 사실이고 진리인가?  이 세상에는 많은 신자들이 굶고 있지 않은가?  성경은 천국 간 거지 나사로를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눅 16:20)  다윗도 사울 왕을 피해 다닐 때 나발에게 양식을 구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다윗의 언급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 아닌가?
  
다윗의 이 말이 영감된 진리라면 이 문제의 해답은 무엇인가?
아래 세 가지 해답이 가능하다.

1. 엄격하게 말해서 본문은 보편적인 주장은  아니다.  단지 다윗 자신의 경험에 대한 언급이다.  그는 내가 어려서부터 이제까지 결코 보지 못했"고 한다(25절)
2. 다윗은 굶주리는 의인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을 뿐이다.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3. 잠언처럼 이 언급은 보편적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따르도록 명령된 사회 속에서 의롭게 사는 자들이 양식을 구걸하는 것을 보기가 쉽지 않다는 일반적 규범으로서만 취해야 한다(6). 잠언적인 형태의 표현은 원래 경험의 큰 부분을 다룬 것으로 예외나 소수의 반대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의인은 당대만 아니라 그들의 후대에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으로 우리는 그런 사실을 눈으로 보고 산다.  제3세계의 많은 국가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겼으며 그 후손들이 빈곤과 기근과 질병 등으로 인해서 많은 고통과 슬픔 중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저들에게도 복음이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으니 저들의 후손들에게는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길게 보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적게 소유하던 많이 소유하던 버리지 않으시며 그들의 자녀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7). 물론 일시적으로는 그들이 버림을 받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는 버림받지 않으며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교훈들은 이미 지혜서에서 시작된 것으로 신약의 빛으로 볼 때 그 문제가 풀리게 된다(8).  따라서 이 본문은 인생을 충분히 살지 못한 젊은이에게 나이 든 성도가 그의 경험에 의한 교훈으로 가르치기에 적합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주
   1. Matthew Poole, Psalms-Malachi(London: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58
   2. Peter C, Craigie, Psalms 1-50(Waco: Word, 1983), p.297
   3. Walter A. Elwell, Edit.,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Grand Rapids: Baker,1992),  p.50
   4. 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When Critics Ask(Victor Books, 1992), p.237
   5.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Old Testament(Victor Books,1985), p.822
   6. 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Op.cit., pp.237-238
   7. Walter C. Kaiser Jr,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88), p.156
   8. Cf. Keil and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5(Grand Rapids: Eerdman, 1980), p.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