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RevSuh  2008-08-01 16:46:35 hit: 1,355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1)


이 시편은 주님의 십자가와 뗄 수 없는 관계다. 그것은 그 서두의 말씀이 우리 주님에 의해서 인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첫 부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몸의 상태와 심적인 경험을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1). 그뿐 아니라 시편 22편은 마치도 그들이 그가 메시아이셨음을 보여 주기 위해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묘사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신약의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중요한 자료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인용된 13개의 주요한 구약의 본문 중 시편에서 9개가 인용되었으며 시편 중 22편에서 5개를 인용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버림받으신 주님의 외침이다(마 27:46; 막 15:34)(2).
  
그러나 상당수의 학자들이 이 시를 메시아의 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시가 메시아에 관한 시라고 할 경우 어떻게 이 시편 기자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의 수난으로 옮길 수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시편 기자의 말씀들이 그들의 원래의 화자(Speaker)(다윗)에게서처럼 예수님에게 적합하게 적용할 수가 있겠는가고 반문한다.
  
먼저 이 시가 어떤 형편에서 쓴 내용의 시인지부터 알아보고 문제를 풀어보자.
  
이 시는 개인적인 애가의 시로 슬픔과 고뇌로 시작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애가의 시가 그러하듯이 마침내는 그 어려운 형편에서 구원될 것을 내다보며 감사하며 찬송한다.  이 시의 구조적 구분으로 보면 분명히 어떤 단어들이 강조적으로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나의 하나님 그리고 아직 당신은(1, 3절) 그러나 나는 (6절), 아직 당신은 (9절), 그리고 그러나 당신은(19절)이다.
  
이제 이 시가 정말 메시아를 가리킨 시로 볼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위에서 보았듯이 이 시는 당신과 나라는 단어가 강조적으로 쓰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거기서 그 당신이 누구를 가리켰는지를 아는 것은 이 시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지시하고 있는지의 해답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실마리가 3절에 거룩한 자를 가리키고 있는 언급과 함께 나오는 강한 반의 접속사다.  이 형용사는 아마도 하나의 속성으로서의 역할을 하거나(당신은 거룩하시니이다) 새 국제역(NIV)의 당신은 거룩한 자로서 보좌에 앉으셨나이다 에서처럼 하나님 자신을 언급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두 번째의 가능성인 거룩한 자가 정확한 번역이라면 문제는 풀리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거룩이라는 히브리어 카도쉬(    )는 불분명하다.  하나의 속성으로서 역할을 하므로 거룩한 자로서 하나님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그의 성소(LXX:비교, 114:2)나 그의 거룩한 보좌(Dahood)를 위한 환유로서의 역할도 하는 것 같다(3).
  
그럼에도 거룩하신 자를 가리키고 있으리라는 것이 전체 문맥에 잘 부합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 거룩하신 자는 약속에서 오실 자와 연관이 있으며 그 분은 조상들이 신뢰하였던 분이시다.

창세기 15:1-6에서 족장들은 단지 그들의 신뢰를 하나님께 둔(단순히 유신론자들)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씨에 두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그가 자세하게 밝히지 않는 고통과 고뇌로 괴로움을 당했을 때  같은 주님께 구원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이 다윗의 고통과 구원이 메시아의 것이 될 수 있는가?  다윗에게 일어난 사건은 나라를 통치하는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위치에서였는데 주님이 친히 어느 날 다스리시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중요성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윗에 대한 원수들의 공격이나 구원은 후에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때 성취될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나라를 공격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 중에 하신 말씀이 본 시편의 내용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차라리 이 시가 당신이 당하실 고난으로 십자가를 지실 때 이루어 질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인용하셨고 외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과 서신에 그렇게 많이 본 시편을 메시아의 고난으로 인용하고 있는 것은 이 시가 과연 제5복음서라고 부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시 22:19; 참고, 요 19:24; 마 27:35; 막 15:24; 눅 23:34; 히 2:12)(4).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으리라. 초대 교회에 따르면 이 시에서 화자는 다윗이 아니라 그리스도였다.  이런 확고한 신념에서 초대교회는 이 시를 당대의 역사로 해석한 맙슈에스티아의 데오도르(Theodore of Mapsuestia)를 정죄하였다(5).
  
빈젠(A. Bentzen)도 여기서 고통은 병의 설명이 아니라 처형에 대한 기술이다.  다윗은 한번 돌로 침을 당하였으나(삼상 30:6) 이것은 아주 다른 장면이라 하였다.  이 시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다윗의 다른 시에 관하여 베드로가 쓴 말씀 안에 있다.  선지자로서 그가 미리 보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하였다(행 2:30-31)(6).
  
그러므로 주님은 다윗의 조상들이 신뢰하신 분으로 약속의 사람이요 메시아이신데 다윗이 지금 사나운 공격을 받으면서 그의 생명을 그분에게 신뢰한 같은 분이시다.  그리고 그런 공격들은 메시아가 친히 어느 날 직면하게 될 것의 그림자일 뿐이다.
  
다윗은 그의 생전에 오실 마지막 분의 고통들을 보았으나 역시 그 메시아가 결코 쇠패하지 않을 나라를 가지고 승리로 나타나실 것도 보았다(7).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저자 자신이 상상이나 창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말씀은 그 당대의 한 사건에만 연관되거나 그 당대만을 위한 교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언서의 구원에 대한 약속들은 당대에만 아니라 후대에 메시아에 의한 우주적이고 궁극적인 구원과 연관이 있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

     주
     1. The New Bible Commentary, Revised(London: IVP, 1970), p.464
     2. Walter C. Kaiser, Jr. More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92), p.198
     3. Willem A. Vangemeren, Psalms, E. B. C. Vol.5(Grand Rapids: Zondervan, 1991), p.202
     4. Peter C. Craigie, Psalms 1-50(Waco: Word, 1983), p.202
     5. C.F. Keil and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V(Grand Rapids: Eerdmans,1980), p.306
     6. Dearer Kidner, Psalms 1-72(Downers Grove: IVP, 1973), p.105
     7. Walter C. Kaiser, Jr. Op.cit.,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