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16:8-10)
이 시편 기자의 기쁨의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로 그의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므로 그에게 피할 수 있기 때문이며(1-2절),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항상 선하시었다(2, 5-8절). 그는 그의 존재의 근거로서 하나님을 찾으면서 결코 실망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생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5-6절) 죽음에서 그를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였다(9-10절). 비록 그가 죽어 무덤에 들어갈 것이나 주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영원한 분리의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1). 그런데 이 시는 다른 몇 개의 시편과 함께 신약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구절로 인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오순절날 베드로는 이 시편 16편을 예수님이 기다렸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논증에서 견본을 삼았고(행 2:25-33), 바울 역시 안디옥의 회당에서 그렇게 증거하였다(행 13:35).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학자들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유대인의 해석에서 시 16편은 전통적으로 메시아의 시로 이해되지 않았다고 반대한다. 많은 학자들이 이 시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시에 근거하여 세운 사도들의 증거는 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시편의 초기의 의미는 사실상 메시아적인 것이었거나 또는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었다(Peter C. Craigie).(2) 이렇게 본다면 시편 16편은 구약의 난제 중에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러면 과연 본 시편은 메시아와 연관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없는가? 만일 이 시가 메시야와 연관이 전혀 없는 것이라면 사도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 되고 만다. 먼저 다윗이 이 시를 어느 때 썼는지부터 알아보자. 이 시편은 다윗이 그의 생애 중 어떤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하여 썼다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마도 (1) 그가 중병 중에 썼거나 (2) 그가 시글락에 머무는 중에 우상을 숭배하도록 시험받았을 때 (3) 그렇지 않으면 그의 나라의 장래에 대한 나단 선지의 예언에 대한 반응으로(삼하 7장) 썼을 것이다. 그 중에서 마지막 사건이 이 시의 메시야적 내용과 가장 잘 부합한다. 다윗은 그 자신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왕국의 장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그 자신이나 하나님의 영원한 씨(후손, 거룩한 자)도 무덤에 남겨 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안전히 쉬리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씨나 거룩한 자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임재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하리라는 약속을 하셨다. 그렇다면 이 9절에 무덤에 버려지지 않으리라는 표현은 시편 기자가 장래의 부활을 소망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지상에서 모든 해로움으로부터 그의 몸과 영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지켜 주실 것이라는 그의 신앙을 표현한 것인가? 그 해답은 거룩한 자라는 히브리어 하시드( )(사랑하는 자나 충성된 자)라는 단어의 의미와 중요성에 달려 있다. 하시드는 하나님의 종에 대한 명칭이다. 70인 역에서 하기오이스( )의 사용은 그 뜻이 모호한데 아마도 헌신된, 경건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또는 거룩함 일 것이다. 불가타역(Valgate)에서는 너의 거룩한 자로 번역하였다(행 2:27)(3). 이 하시드란 말은 구약에 33회 나오는데 모두 시적인 본문에 나온다. 17번은 복수로, 11번은 단수로 나오며 4번은 변형으로 나온다. 시편 4:4-5에서 다윗은 그가 야웨의 하시더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시편 69:19-20은 다윗과 하시드란 말을 연관시킨다. 거기서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거룩한 기름을 부었도다. 여기 내 종(메시아적 단어)과 기름을 부었다(역시 메시아와 같은 어원임)가 나오는데 그것은 다윗과 야웨의 거룩한 자가 같은 것을 나타낸다. 모세 시대에도 맛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하였는데 거기서도 너의 하시드로 말씀했고 출애굽기 17:2, 7에서도 시험받으신 유일한 분은 여호와시라 하여 거룩한 자와 여호와를 동일시하였다. 역시 17회 나오는 하시드의 복수형도 해석상 문제가 안 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을 아브라함의 씨라 했다. 또 기름부음 받은 자, 종 그리고 장자란 말도 같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각각 단수와 같이 복수로 쓰였다. 이런 맥락에서 이 본문은 이 중의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다윗은 참으로 죽었으나 그 하시드는 영원하였다. 다윗 자신은 하나의 기름 부은 자였으나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영원하셨다. 그러므로 그 사실이 장래에 대한 다윗의 신뢰의 보장이었다(4). 여기서 시편 기자는 그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조하면서 그의 생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무덤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요 또 스올에서 예수님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니까 위기 속에서도 만일 천수를 다할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제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죽음은 결코 온전하게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편 16편의 새로운 의미에서 그 죽음의 쏘는 것은 제거되었으며 무덤의 마지막 위협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정복되었다(5). 따라서 베드로와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들의 죽음이 언제 오던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실로 인하여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었고 또 증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바울이 이 시편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메시아의 예언으로 해석한 것은 옳았다.
주 1. Willem A. Van Gemeren, Psalms, E. B. C Vol,5(Grand Rapids: Zondervan, 1991), p.158 2. Peter C. Craigie, Psalms 1-50(Waco: Word, 1983), p.158 3. Willem A. Vangemeren, Op.cit., p.160 4. Walter C. Kaiser, Jr, More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92), pp.194-197 5. Peter C. Craigie, Op.cit., pp.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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