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 12:10)

이 구절이 혹시 지상에 두 메시아가 오실 것을 가리키는가?
또 여기서 동사 바라본다는 말의 주어는 찌른 이란 말의 주어와 같은가?  나에게란 말은 10절에 그에게(him)와 같은가?  찌르는데 가담된 자들은 종말에 그를 바라보고 비통하게 슬퍼할 자들과 같은가?  영이신 하나님을 찌르는 것은 가능한가?  등의 여러 가지 문제가 이 구절을 난제로 만들고 있으며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해석들은 본 구절이 과연 메시아이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고 또 되어질 예언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전통적인 메시아 구절로서의 해석을 지지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한다.
  
먼저 두 메시아 설에 대한 입장부터 살펴보자.
유대 해석자들은 여기서 두 메시아를 위한 사례를 찾아내는데 요셉의 아들인 메시아 그는 고난받으신 분이요 다른 이는 다윗의 후손의 메시아로 고난받지 않고 지상에 평화가 올 때에 통치하시기 위해 영광과 능력으로 오실 분이다.  그러나 이 두 메시아설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메시아 해석에 대한 반응으로 후대에 와서 고안해 낸 것일 뿐이다.1)
  
저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였다.  메시아는 세상에 와서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이방 세력을 정복하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축하여 다스리심으로 다윗과 솔로몬 때의 영광을 회복할 분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찔리시고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실 메시아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이 구절이 과연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한 것인지를 알아보자.
이 구절이 직접 메시아를 가리킨 구절인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에서 자세의 변화(회개의 슬퍼함)는 이 예언의 장래에 그 중요성이 있음을 예견하게 한다.  스가랴 때에 하나님의 배척은 그리스도에 대한 배척의 한 전형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메시아적인 구절이다.  다시 말해서 직접적인 예언으로서 이기보다 형태로서이다.2)
 
 따라서 이 구절이 메시아를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들은 그 백성들의 회개에 대속적 고난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존스(Jones)는 이 구절을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과 연관시킨다.  스가랴 12장의 이 알려지지 않은 예언은 대속적 고난의 신비에 접하며 그 범위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핵심적인 신비를 기대하게 한다고 하였다.
  
또 부르스(Bruce)는 희생자가 단번에 찔렸고 결코 다시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찔림과 애통은 스가랴 13:7의 말씀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고 또 찔린 자와 맞은 목자는 모두 유대인의 왕으로 매를 맞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된다고 하였다.3)
  
그런데 문제는 원문은 아마도 그에게(우리말 성경) 대신에 나에게(on me)로 읽었을 것이며 이 경우에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4)

1. 선지자의 마음속에는 어떤 역사적인 인물 주전 170년에 암살된 대제사장 오니아스(Onias III)나 주전 134년에 암살된 시몬 마카비(Simon the Mccabee)가 있었을 것이다.
2. 그의 대행자의 인격을 통하여 찔린 자는 여호와시다(A.e. Kirkpatrick).
3. 바로느고에 의해 살해된 선한 왕 요시야였다.
4. 요한 칼빈(John Calvin)은 그 죽음을 비유적으로 취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의 방법을 따라서 말씀하시며 그가 그의 백성들의 죄로 상하셨으며 특별히 그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완고한 경멸로 인해서 상하시었다.5)

그러나 이 예언이 장래 말세에 있을 사건이요 메시아에 대한 예언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퍼로운(T.T.  Perowne)은 화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반역과 배은을 통해 비유적으로 그를 찔렀다.  그들은 문자적으로 그를 찔렀으며 요한복음 19:39대로 십자가에서 그의 아들의 몸에 그들의 완고하고 더할 수 없는 잔악한 행동으로 인해서 찔렀다고 하였다.6)
  
여기 찔렀다는 것은 죽음으로 찔렀다는 뜻이요 분명히 (성육하신)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배척이요 그 말이 특별히 십자가의 처형을 가리키지는 않지만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바라본다는 말은 육신적인 안목(생각)이나 영적 안목(신앙)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여기서 그 둘 다를 가리킬 것인데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아를 알아보고 그에게 돌아 갈 때인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날 것이다.
  
삼인칭에 대한 변화(나를 위해 운다는 대신에 그를 위해 애통함)는 예언 문학에서 보편적이다.  죄를 인한 애통은 사적인 애통의 행위나(10절) 애통의 공적 행동(11절)으로 예증된 것으로서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격려되었다.7)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장래에 있을 사건의 예언으로 메시아의 초림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이제 그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못된 메시아 관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사역으로 해서 애통하며 그 메시아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 일환으로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에서 그 일부가 성취되었다(행 2:37-41).  따라서 이 구절은 서로 다른 두 메시아의 강림을 가르치지 않고 이미 한번 오신 메시아 그 분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것을 가리킨다.  그 분은 이제 권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
   1. Walter C. Kaiser, Jr., More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92), p.264
   2. H.C. Leupold, Exposition of Zechariah(Grand Rapids: Baker, 1971), p.237
   3. Ralph L. Smith, Micah-Malachi(Waco: Word, 1984), p.278
   4. The NIV Study Bible(Grand Rapids: Zondervan, 1985), p.1420
   5. Joyce G. Baldwin, Haggai, Zechariah, Malachi(Downers Grove: IVP, 1972), p.191
   6. William M. Greathouse, Zechariah, Beacon Bible Commentary, Vol.5(Kansas City: Beacon, 1966),p.393
   7.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Old Testament(Victor Books, 1985), p.1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