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된 신앙, 참된 믿음
  본문 : 삼하 19:24-30
RevSuh  2014-09-19 17:58:17, 조회 : 2,656, 추천 :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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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 참된 믿음(삼하 19:24-30)(10/17/04)

본문에 나오는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사울왕의 손자다. 아버지 요나단과 사울왕이 불레셋과 길보아산 전투에서 모두 죽임을 당한다. 그때 므비보셋은 어린아이였는데 그를 맡아 보살피던 유모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과 패전소식을 듣고 두려워 므비보셋을 안고 급히 도망을 치다가 그만 그 아이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저는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그 후에 그는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란 사람의 집에서 자란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요나단과의 우정을 회상하며 그의 후손이 남아 있다면 선대하리라는 마음을 먹고 수소문을 한다. 사울왕의 청지기로 재산을 관리했던 시바를 찾았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살아 있음을 알고는 그를 궁으로 데려오게 하고는 그를 왕자처럼 왕의 상에서 먹게 하였다. 오늘 본문은 다윗왕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란을 했다가 돌아올 때 함께 피란길에 오르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므비보셋이 왕을 맞으러 나가 대면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내 믿음은 참된가?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본문에서 우리는 참 신앙이 무엇임을 배울 수 있다. 그러면 본문의 므비보셋의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길보아산 전투에서 불레셋 군대에게 사울왕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므비보셋은 이제 겨우 5살이었다. 그는 왕의 사랑받는 손자였으나 전사한 조부 사울왕이 새로 왕이 된 다윗을 그렇게 죽이려 따라 다녔기 때문에 다윗왕에게는 원수의 손자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두발을 저는 장애인이 되었다. 어머니에 대한 말이 없고 유모의 얘기만 나오는 것을 보면 그는 아예 고아가 되고 만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엄청난 불행을 겪어야 했던 10대 소년 므비보셋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요 슬픔이었다.
전에는 불레셋 사람이 두려웠으나 이제는 다윗왕이 두렵게 됐다. 나라가 할아버지 손에서 할아버지가 죽이려했던 다웟왕에게 돌아갔으니 할아버지의 모든 소유도 나라의 소유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가전 것도 없이 이름도 신분도 감춘 채 숨어 지내는 가련한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다윗왕이 그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이제는 올 것이 왔구나? 이제는 끝이구나 왕이 나를 살려 주시겠나? 두려웠다. 아마 그가 다윗왕을 보자 벌벌 떨었을 것이다. 다윗왕이 그를 보고 한 첫마디가 이를 무서워말라 무서워말라! 그리고 이어서 왕은 그에게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으로 인해서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상상도 못하던 말이었다.
다윗왕은 계속해서 네 조부의 모든 밭은 다 네게 다시 주겠다. 너는 항상 궁궐의 내 상에서 왕자처럼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네 조부의 청지기였던 시바와 그의 종들을 다 네 종으로 주겠다. 다윗왕께 기대못했던 큰 은총과 사랑을 받게 된 므비보셋은 너무 황송했다. 그래 8절에 이렇게 반응한다. 왕에게 큰절을 했다. 그리고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와 같은 저를 돌아보시나이까? 감격했다. 감사했다. 기뻤다. 이제 모든 것이 변했다. 종이였는데 원수였는데 왕자처럼 되었다. 받을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은 자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참 믿음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왕의 큰 은혜를 받은 므비보셋과 같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 예수를 알고 믿기 전 다 죄인이었다. 죄의 종이었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였다.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로마서 5장 8절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예수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를 죄인되게 하시고 그를 심판하시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그 결과의 무서운 심판에서 구원하셨다.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성령님께서 깨닫고 믿게 하셨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영생을 얻게 되었다. 믿음으로 죄사함받고 완전한 의인이 아니나 예수 안에서 우리를 보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삼아 주시어 아들의 유업을 잇게 하셨다.
갈라디아 4장 5절이 그것이다.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고 아들인고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그리고 아들이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
므비보셋이 받은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아니 그와는 비교가 안 되는 더 큰 축복을 주신 것이다. 비교해 보세요.  다윗왕의 은총/ 하나님의 은총/ 다윗왕궁/ 천국/ 다윗의 왕자처럼 됨/ 하나님의 아들 딸(자녀)이 됨/ 얼마동안 왕의 은총을 누리고 죽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영원히 누리며 산다.
무슨 공로로요? 공로는 없어요. 다만 므비보셋이 다윗왕의 은총을 받은 것은 단순히 돌아가신 아버지 요나단의 덕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공로는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전부다. 창세전에 택하시고 아들을 보내사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사 믿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천국의 영광까지 누리게 하신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은혜구원이다. 이것을 깨닫고 사는 것이 참믿음이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므비보셋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믿음의 구원 그 믿음도 하나님이 주셨으니 모두가 은혜이다. 감사한다. 기뻐한다.  과거에 죄와 그 결과의 무거운 짐지고 어둡게 살지 않는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기쁘고 밝게 산다. 내 환경에 상관없이 내 구주 예수를 모시고 살기에 그 어디나 천국이 된다. 이것이 참 믿음이다.
참 신앙이 무엇인가?
므비보셋은 다윗왕의 궁궐에서 다른 왕자처럼 대우를 받으며 왕의 상에서 먹었다. 조부 사울왕의 모든 토지를 되돌려 받았다. 시바가 청지기로 그 소유를 관리해 준다. 정말 기뻤다.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복되었다. 다윗왕의 은총을 마음껏 누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왕은 나이가 많았고 왕이 사랑했던 아들 압살놈! 형을 죽이고 도망간 것을 불러들여 사랑한 아들! 바로 그 아들 압살놈이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더니 드디어 왕이 되었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다윗왕과 신하들이 서둘러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피란길에 올랐다. 왕은 맨발로 울면서 예루살렘을 떠났다. 절뚝발이였던 므비보셋, 왕의 은총을 받은 자인 므비보셋은 어찌 했나?
왕을 따라가기 위해 나귀를 예비해 두었다. 그런데 그의 청지기요 종이었던 시바가 그를 속이고 나귀를 몰고 사라져 버렸다. 그는 왕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예루살렘에 남게 되었다. 25절에 다윗왕이 네가 왜 나와 함께 피란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가 한 대답이 그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므비보셋은 어찌 살았나? 그를 고소한 종 시바의 고소와는 사실과 달랐다. 므비보셋이 예루살렘에서 호강하며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며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므비보셋은 왕이 떠난 날부터 왕의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깍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했다.
그에게 은총을 베푼 왕과 함께 피란을 갈 수 없게 되자 그는 예루살렘 왕궁에 있으면서도 피란길에 오른 왕의 고난에 동참했다. 마치도 그의 친부모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슬퍼하였다. 슬퍼하고 애통하면서 자신은 의식적으로 부정한 자처럼 하였다.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이 므비보셋의 모습에서 참믿음을 배울 수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가? 구원의 축복을 누리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몸버려 피흘리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므비보셋이 왕궁에서 왕자처럼 대우받으며 복된 삶을 누렸듯이 구원의 축복과 보호와 공급의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살아도 은총을 베풀어 준 왕이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에 동참한 므비보셋처럼 주님의 고난에 구원의 은총을 주신 주님의 고난에도 참예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참 믿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달게 받는 것이다. 그것이 참 믿음이 되는 것은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고난은 우리로 모든 일이 형통하여 기쁘고 즐거워할 때 볼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한다. 그래서 강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능력안에 머물게 한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참 믿음은 하나님만,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게 한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주께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자고하지 않게 하게 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고후12;7). 그리고 그가 약할 때 참으로 강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였다(10절).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가? 여러분에게 닥쳐오는 고난과 시험과 시련을 어찌 보시나? 그 믿음의 시련들이 인내를 만들어 내어 온전함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보나? 고난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고 구비케 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어지나?
여러분들에게 부딪쳐 오는 시험과 환란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함인 줄 알고 오히려 기뻐하시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데 왜 고난이 오며 불평하고 낙심하나?
  엊그제 어느 집사님, 자주 병원에 드나드시는데 풍기가 있으셔서 병원에 또 입원하셨다. 오른쪽에 마비가 왔다. 손발에 힘이 없다. 말이 잘 안 된다. 목에 마비가 와서 물도 마시지 못하고 식사도 입으로 못하신단다. 이제는 배에 구멍을 내서 그곳으로 식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제 겨우 걷게 되어 주일을 지키게 되셨는데 얼마나 상심이 되나? 그래 약해 질대로 약해 지셨다. 우시기만 한다. 제가 고린도후서 4장 16절 말씀을 읽어 드렸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
집사님! 낙심할 일이 아니라 병원에 입원했고 좋은 의사가 있고 약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아파도 병원에 올 수 없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물론 의사와 병원이 줄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기대에 못미치기 때문에 소망적이기 보다 낙심이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신자, 믿음이 없는 이에게 없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 창조주 하나님, 모든 것이 가능하시기에 원하시면 모든 병을 고치실 수 있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나는 그의 자녀다란 이 믿음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힘있게 소망스럽게 한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아픔을 아시고 도우시고 구원해 주신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고 용기를 가지십시오. 이 고난을 통해 이루실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참 믿음은 고난도 내게 유익함으로 믿는 것이다. 아니 유익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참 믿음은 더나아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러분!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예수를 믿는 자를 핍박하는데 앞장섰을 때 환상 중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사울아 네가 왜 신자를 핍박하느냐였나? 아니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였다. 예수님께서는 참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당신이 고통을 느끼신다. 고난당하는 성도, 그 성도의 고난을 주님의 고난으로 믿고 그 고난에 동참하고 고난의 짐을 함께 나눠지는 것이 바른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내 육체에 채우노라, 참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종들이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는 그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산이나 바다나 강이나 육지나를 가리지 않고 세상 끝까지 갔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그는 그의 육체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생긴 상처처럼 수많은 상청의 흔적을 지녔다. 고난의 증거가 있었다.
여러분! 이 믿음은 참 믿음인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 증거가 있는가? 새겨진 고난의 흔적은 없을지라도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지워진 흔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흘린 땀은 있어야 한다. 지워진 흔적이지만 주님이 기억하신다. 고난의 흔적, 수고의 흔적이 있어야 참 믿음이다. 그러므로 참믿음의 성도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의 중한 것에 비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을 위해 현재의 고난의 흔적을 마다하지 않는다.
참 믿음이 무엇인가?
여기 므비보셋의 종 시바를 보라! 주인을 속이고 나귀 두 마리에 떡 200덩이, 건포도 100송이, 여름실과 100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피란가는 다윗왕을 맞이했다. 왕이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들을 가져왔느냐고 물으니 나귀는 왕의 권속들이 타고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시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소서. 네 주인 므비보셋은 어디에 있느냐?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그가 무얼 하고 있느냐?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려 한다고 합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분개했겠나. 은혜를 모르는 므비보셋이구나! 다윗왕은 시바에게 내가 되돌려 준 므비보셋에게 있는 모든 소유가 다 네 것이니라. 시바는 주인의 소유를 다 얻어냈다.
왕이 피란길에서 돌아올 때 요단강을 건너기전에 시바는 또 아들 15명과 종 20명으로 더불어 왕앞에 나왔다. 얼굴에 도장을 찍었다. 충성된 신하로 가장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참된 충성이 아니었다. 왕에게 아첨하고 왕으로부터 얻어내려는 술책이었다. 그에게는 축복에 대한 욕심이 전부였다. 참 신앙이 무엇인가? 축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고 복 받기 위해 왕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시바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왕 다윗은 속았다. 그래서 그가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전왕 사울의 모든 밭을 다시 시바에게 다 주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속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의 동기까지 보신다. 므비보셋을 보라! 그가 왕을 따라 피하지 못한 것은 그의 종 시바의 속임 때문이었다. 그의 모든 소유를 잃게 된 것은 그의 종 시바의 배반과 거짓 고소 때문이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불평하지 않았다. 므비보셋은 왕이 그에게 베푼 은총, 왕자처럼 먹고 되찾은 주인의 재산, 많은 땅, 밭 때문에 왕을 존경하고 왕께 감사하고 섬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산 것만도 왕의 큰 은혜임을 알았다. 다윗왕이 시바가 거짓말한 것을 알고 그에게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왕이 시바에게 준 것을 절반 나누게 했다. 그때 므비보셋이 한 말이다. 30절,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므비보셋의 관심사는 땅이 아니었다. 그가 누릴 왕의 축복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사는 왕이었다.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내 소유는 왕이 주셨다. 종 시바에게 다 주소서!
참 믿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루시는 축복에 방법을 맞춘 신앙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고 구하고 그것을 가지며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참 믿음은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고 그 하나님으로 만족해하고 그 하나님을 구하고 그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이다.  하박국 3장 17-18절 말씀이 그것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오래 전에 미국의 어느 신문 기자가 멕시코 대통령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북미와 남미가 그처럼 다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멕시코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것은 시작이 달랐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북미의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찾고 남미의 예스파니아 사람들은 gold(금)을 찾으러 왔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러 갔던 청교도들은 하나님도 만나고 금도 가졌지만 금을 찾으러 갔던 사람들은 금도 놓치고 하나님도 놓쳤습니다. 부유하게 되고 풍부하게 살았을 때에 저들은 돈을 만들고 청교도들이 자신이 쓰던 돈의 뒷면에 In God we trust라고 새겼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그들의 참 믿음의 신앙고백이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기쁘게 하나? 즐겁게 하나? 감사하게 하나? 축복스럽게 하나? 물질인가? 돈인가? 물질을 따라가게 되면 하나님을 포기하게 되고 하나님을 포기하면 물질도 사라진다. 그러나 여러분 참 믿음을 지니고 하나님을 따라가고 하나님으로 만족케 하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물질도 따라온다. 하나님이 주신 것 가지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그 이상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그것이 참 신앙이다.
여러분! 밭에는 알곡만이 아니라 가라지도 자란다. 교회안에 모든 신자가 다 참 신자는 아니다. 쭉정이 같은 신자도 있다.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 사명을 위해 땀을 흘리는 수고! 그리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신앙! 여러분 모두 이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