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분쟁에서 화해로
  본문 : 삼하 20:14-22
RevSuh  2014-10-29 12:14:32, 조회 : 2,755, 추천 : 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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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에서 화해로(삼하 20:14- 22)(10/31/04)

27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성북구 어느 교회에 담임 목사님이 미국 유학 중에 그 교회를 담임하셨던 목사님이 어느 헌신예배 시간에 설교를 해 달라고 하셔서 갔었다. 그 임시로 담임을 맡으신 그 목사님이 예배당을 지었다. 그리고 새 예배당 안에 의자며 피아노며 모두 새로운 것으로 잘 갖추셨다. 그 교회는 내분이 심한 교회였다. 그래서 제가 이해가 어려웠다.  목사님! 밖에서 들리는 말은 교회가 분쟁이 있다던데 어떻게 이런 큰일을 이루셨습니까? 그 목사님의 대답이다. 분쟁은 여전하지만 일은 됩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교회는 완전히 두 파로 나뉘어 분쟁중입니다. 화해를 모색하고 애는 쓰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일은 해야 되겠고 할 수 없었지요. 분쟁을 역이용할 수밖에요. 일을 할 때마다 양 파의 대표를 한 사람씩 불렀다. 그리고는 경쟁을 시켰다. 저쪽에서는 강단에 강대상을 해 놓겠답니다. 어찌 하겠습니까? 그래요. 그게 얼마나 듭니까? 묻고는 우리는 피아노요. 이쪽에서는 본당에 의자를 해 놓겠다는데요. 그래요? 그러면 우리는 교육관에 새 의자요. 이런 식으로 크게 어렵지 않게 교회도 지었고 성구도 다 갖출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뻐하실까? 예배당 짓는 것이 우선일까? 일치와 화해가 우선일까? 일이 우선인가? 화해와 사랑이 우선인가? 성경은 잠언 17장 1절에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교회만이 아니다. 부부간에도, 한인사회에도 아니 나라와 국가 간에도, 갈등과 분쟁과 전쟁이 쉬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타락한 인간이 모인 곳에는 어디에나 분쟁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오늘 본문 말씀도 분쟁에 대한 말씀이므로 왜 분쟁이 생겼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분쟁을 해결하고 화평케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분쟁의 원인이 무엇이었나?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요압이 반란 주모자였던 압살롬을 죽임으로 그 내전은 끝이 났다. 이제 왕이 예루살렘으로 환궁하게 되어서 요단강가에 이르게 되었다. 많은 백성들이 왕을 모셔 오기 위해 모여 들었다. 그때 온 유다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 절반이 왕을 호행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 왕은 온 이스라엘의 왕인데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너희 유다 사람들이 왕을 옹위하여 요단강을 건넜느냐고 따졌다. 섭섭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이 왕은 우리 지파 사람이 아니냐? 우리와 더 가깝지 않느냐? 우리의 지친이다. 무엇이 잘못됐다는 거냐? 맞받아쳤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10/12이 아니냐? 그렇거든 어찌 너희가 온 이스라엘의 왕 모셔오는데 우리와 의논하지 않았느냐? 설전이 오고갔다. 감정이 격해졌다. 그런데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했다. 더 목소리가 컷다. 큰 목소리에 눌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잠잠할 밖에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섭섭해졌다. 그런데 다윗 왕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유다 백성들의 편을 든 셈이 되고  말았다. 다윗 왕은 유다 백성에게 더 가깝다던 의심에서 그것이 확인된 셈이 되자 불만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사울 왕의 지파에 속한 유력한 집안의 아들로 불량배였던 세바가 나타났다. 불만을 품은 유다 사람들의 세력을 규합하려고 했다. 자기 세력의 기회를 삼았다. 나팔을 불었다.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우리는 다윗 왕과 함께 나눌 것이 없소이다. 이새의 아들 안에서 우리는 아무 분깃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각기 집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그 자리를 뜨니 그 말에 감정이 상했던 많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 다윗 왕을 버리고 세바를 좇았다. 나라에 분열이 생기고 말았다. 왜 분쟁이 생기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왤까? 수년간 한국에 와서 선교한 선교사가 합동 목사님에게 새삼스럽게 한국에 제일 많은 성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더란다. 그 목사님은 선교사의 의중을 읽지 못하고 그거야 김씨, 이씨, 박씨지요. 그 중에서 김씨가 제일 많지요. 그랬더니 선교사가 아닙니다. 한국교회에 제일 많은 성씨는 나씨입니다. 나가입니다 라고 했대요. 나씨, 나가가 왜 문제가 되나? 왜 공동체내에 분쟁의 불씨가 되는가? 우리 이민교회는 우선 교회를 시작할 때 교단에 상관없이 미국교회를 빌려서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내 교회 형편이 아니면 건물을 빌려 준 교회의 사정상 교회당을 옮겨야 할 경우가 자주 생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쉽지 않다. 왜요? 나씨가 많으니까요. 서로 자기주장의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다보면 감정이 상한다. 격해진다. 다툼과 분쟁이 생긴다.
개척교회의 시기를 지나 교회당을 사거나 자체 교회 건물이 필요할 때가 온다. 교회당을  사거나 지어야 한다. 또 의견이 갈린다. 교회당 건물을 사거나 짓는 것은 필요없다. 왜 그 돈을 선교나 구제에 쓰지 건물 같은 것 구입에 쓰느냐? 그러나 또 다른 신자들은 꼭 사야 한다. 아니다. 우리의 필요에 맞게 지어야 한다 로 갈린다. 큰 소리가 오고간다. 감정이 상한다. 분쟁이 생긴다. 교회는 지속이 되지만 목회자는 은퇴하게 되던지 그렇지 않으면 이임하게 된다. 교역자가 바뀐다. 의견이 갈린다. 새 교역자를 찬성하는 교인이 있고 반대하는 교인이 생긴다. 서로 다른 나 중심의 목소리를 낸다. 그러다보면 더 큰소리를 내는 쪽이 있다. 소리를 적게 낸 쪽에서는 더 감정이 상한다. 불만하는 이들이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계속 분쟁과 갈등으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해요. 여기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쟁은 내란이 끝나고 환궁하는 왕을 맞이할 때였다. 교회의 분쟁은 부흥과 발전의 전환점일 때 발생한다. 모두 좋은 일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났다. 호사다마란 말이 옳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마귀역사를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마귀는 그때를 분쟁의 기회로 삼는다.
그러면 다윗 왕은 분쟁을 어떻게 해결하나? 상황을 지켜보던 다윗 왕은 세바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강한 성으로 들어가면 압살롬 때보다 더 큰 위기에 처할 수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윗 왕의 해책이 무엇인가? 장수들에게 세바를 잡으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세바는 아벨성으로 들어갔다, 장수, 요압과 아비새와 모든 군대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워싼다. 그리고 아벨성을 향해 언덕위에 토성을 쌓았다. 그리고 유다의 군대들이 그 성벽을 기어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성을 멸할 수 있게 되었다. 세바 한 사람이 그리로 피했기 때문에 아벨성이 망하게 되었고 성벽을 헐고 돌진할 경우 요압과 그의 군대도 상당한 인명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윗의 방법으로 분쟁이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되면 같은 민족인데 원수처럼 싸워 서로 죽이게 되고 이스라엘의 많은 군사들이 죽어야 했다.  
교회의 분쟁도 마찬가지다. 개인 간의 갈등도 힘으로 감정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해결이 된대도 모두가 상처를 입는다. 주님의 몸의 한 부분이 찢겨나가는 불행을 겪게 된다. 주님의 몸이 파괴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안긴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한다. 복음 전도의 길을 막는다.
그러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쟁은 어찌 해결되나?
16절, 요압과 그의 군대가 토성을 쌓고 이제 막 성안으로 진격을 하려는 위기에 성안에 있던 한 지혜로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가 큰 소리로 소리쳐 그 성을 에워싸고 공격하려는 요압에게 내가 당신과 말하려 하니 가까이 오소서 대화를 요청한 것이다.
여인의 요청에 요압 장군이 성 가까이로 나아갔다. 그 여인이 당신이 요압이십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 여인은 겸손한 태도로 말을 시작한다. 요압에게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요압인들 어찌 하겠나? 내가 듣겠소 한다. 먼저 여인은 자기 소개를 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성의 대표자입니다. 장군이여! 이 성을 공격해서 멸하려면 먼저 화평을 선언해야 옳지 않습니까? 평화를 거절할 때만 공격해야 하지 않습니까? 왜 묻지도 않고 공격을 하려고 하십니까? 또 있습니다. 속담에 아벨성에 가서 물을 것이라고 하고 그 일을 끝냈습니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아벨성으로 가서 지혜자를 찾아 상의하므로 해결했습니다. 그러니 이 성을 멸하기 전에 무슨 일인지 왜 먼저 저와 상의를 하시지 않으십니까? 이 성은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성을 멸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요압이 듣고 보니 정말 여인의 말이 옳았다. 분노와 격한 감정으로 그 성을 멸하려던 요압은 여인의 대화와 설득을 통해 이성을 되찾게 되었다. 요압이 대화에 화답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결코 아니요 다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다윗 왕을 대적하여 그 성으로 들어갔으니 그만 내어 주면 물러가겠다. 성미가 급한 장수 요압도 설득되었다. 그리고 그가 왜 성을 에워쌓는지 공격하려고 하는지 그 여인에게 분명한 답을 주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움 직전에 있었는데 대화를 하게 되니 격한 감정은 자제되고 이성적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성을 포위하고 온 성민을 상대로 싸워 성벽을 헐고 성민을 죽일 일이 전혀 아니었다. 대화를 하게 되니 분쟁과 싸움의 원인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큰 것이 아니었다. 아주 적은 것이었다. 아벨성과 성민이 대상이 아니라 그 성으로 들어간 세바 한 사람이 대상이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개인과 가정을 비롯해서 교회와 사회 국가나 국가 간에 모든 갈등과 분쟁도 해결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해결점을 찾으면 있다. 방법이 무엇인가? 대화다. 마음을 터놓고 솔직하게 대화하다 보면 길이 있다. 오해와 추측의 거품이 제거된다. 지금 남한과 북한 6자 회담중인데 솔직한 대화로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대화를 하다보면 서로가 부풀어진 오해가 컷다. 문제가 발견된다. 적은 것이다. 그러나 대화가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화중이라는 것은 분쟁과 갈등이 싸움이 그친 것뿐이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쟁으로 하면 휴전상태다. 서로 비난하지 않는다. 총부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지도 않는다. 총소리가 나지도 않고 군인이 쓰러지고 전사하지도 않는다. 평화로운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폭풍전야일수도 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대화로 밝혀진 갈등과 불화 싸움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세바를 죽여 그 머리를 요압 장군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적은 일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아벨성은 예부터 이스라엘의 어머니같은 성이다. 화평한 성이었다. 그런데 평화하려면 요압이 군사와 함께 올라가려면 세바를 죽여야 했다. 세바는 이스라엘에 속한 지파 중에서도 전 왕 사울 왕이 속한 베냐민 지파요 그 지파에서 유력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물론 비루라고 했으니 깡패와도 같은 자였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많은 백성이 있었다. 유다와 대치 상황에서 이스라엘 성안에서 이스라엘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혜가 있는 여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지혜로 백성을 설득했다. 한 사람 세바로 이 성이 헐리고 많은 백성이 죽을 것인가? 세바의 목을 치고 온 성이 구원받을 것인가? 지혜로운 여인의 말에 성민이 다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평화를 위해 세바의 목을 베어 요압에게 내어 주었다. 희생의 결안을 했다. 그 결과 요압은 약속대로 나팔을 불어 토성을 쌓고 아벨성을 공격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군인들을 퇴각시켰다. 그 성에 평화가 왔다. 유다와 이스라엘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지혜로운 여인만 산 것이 아니다. 온 성이 모두 구원받았다. 그 성을 멸하지 않으므로 다윗 왕의 존엄에 손상당하지 않았고 성군의 자존감도 지킬 수 있었다. 감정적으로 분노에 차 성을 멸하므로 하나님의 기업을 파괴시키려던 요압도 범죄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화해는 많은 축복을 가져왔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교회 전체가 갈등과 분쟁에 휩싸인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 큰 은혜다. 그러나 사소하게 개인과 개인 간에 오해와 갈등은 있을 수 있었다. 부부간에도 갈등이 있으니 어찌 교인간에 갈등이 없을 수 있겠나? 그러나 그 분쟁이나 갈등은 속히 해소시켜야 한다. 갈등 중에 부추기는 사람이 나타나면 마귀가 역사한다. 교회의 평화가 깨지고 만다. 개인적인 갈등과 분쟁이라도 해소되지 않으면 교회의 분위기를 해하고 나쁜 소문으로 퍼져 교회의 사명을 다할 수 없게 되고 만다.
내가 누구와 갈등을 겪고 있다면 오늘 이 설교를 듣는 내가 먼저 화해자가 되어 풀어야 한다. 어떤 오해와 갈등에는 100% 옳은 사람이 없다. 갈등을 풀려면 내가 먼저 회개하고 내가 먼저 찾아가고 내가 먼저 잘못을 사과하는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
에밀부룬너라는 신학자가 그의 친구와 한 대화를 소개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나빠져 1년간이나 서로 상종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던 중에 한 사람이 설교를 듣는 중에 깊이 뉘우친바가 있어 불화한 친구에게 다섯 통이나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나 답장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날 눈보라를 무릅쓰고 친구의 집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자 눈보라를 뒤집어쓴 친구를 보는 순간 그 친구는 얼음장 같았던 가슴이 녹아 버리는데 단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화해하는 일은 정말 힘든다. 그러나 내가 희생하고 화해할려고 하는 결단을 내리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화해가 이루어지게 하신다. 왠가?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여러분! 마귀는 불화의 명수다. 갈등과 분쟁을 부추긴다. 좋은 일을 분쟁의 기회로 삼는다.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과 갈등을 겪고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담당시키시고 그를 십자가의 형벌로 심판하시므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딸로 삼아 주셨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의 제물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었다. 분쟁의 자녀에서 화목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1844년 2월 26일은 미해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날로 기억된다고 한다. 최대의 항전, princeton호의 축하식에 미국 대통령, 국무장관, 해군참모 총장과 고급 장교들, 상원의원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예표발사를 하다 함포가 폭발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국무장관과 해군 참모총장이 즉사하고 여러 명이 부상했다. 그때 그 참변을 일으킨 함포 바로 곁에는 미주리주 상원의원 토마스 베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고 직전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함께 이야기하자고 해 뒷좌석으로 물러나 화를 면했다. 그는 독설가로 유명했다고 한다.   정적이 많았다.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의 정적이었던 다니엘 웹스터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자는 친구를 깨우면서 오늘 전함에서 내 어깨를 두드린 것은 하나님의 손이었소! 나는 밤잠을 잘 수 없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많소! 용서하시오! 화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화해하니 오늘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면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분 해가 지도록 화를 품어서는 안된다.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어느 사이이든지간에 우리 신자는 결코 분을 품고 해를 넘겨서는 안된다. 부부간에 문제가 아무리 악화가 되고 내 감정이 상했어도 해지기 전에 풀어야 한다. 그것이 신자의 생활이다.
여러분! 오늘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쟁을 화해케 한 지혜로운 여인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어깨를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되시기 바란다. 그리하여 화평케 하는 자로 대화하시도록, 그리고 찾아가 차라리 용서를 비는 희생의 결단을 통하여 화목의 아름다운 관계가 되시기 바란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의 말씀이다. 여러분 이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가 무엇인가? 신자는 화평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화평하지 않은 사람을 화평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내가 화평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신자는 나 자신이 누구와도 화평해야 되지만은 화평하지 못한 사람을 찾아가서 화평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시는 날까지 나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남은 생을 2peace maker로 사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