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의 사랑
  본문 : 요 3:14-19
RevSuh  2015-04-11 21:38:28, 조회 : 2,915, 추천 : 631
설교동영상보기 ☞   목록에서 icon을 직접 클릭하셔도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요 3:14-21)(100800)

하나님은 누구신가? 성경을 펴자마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 속에 많은 진리가 들어 있다. 창조주 하나님!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시고, 사람의 살 곳과 먹을 양식을 예비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시며 다스리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을 짝지어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다. 구절구절이 사랑이다. 사랑이 철철 흘러넘친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다. 오늘 본문도 그 중에 하나다. 그러면 이 본문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Ⅰ.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
사람들은 사랑을 세 가지 종류로 이야기한다. 헬라어로 이 세 가지 사랑을 구별되게 말할 수 있다. 우선 스톨게의 사랑이 있다. 자연적인 사랑이다. 어머니와 아이 간에 사랑이다. 필리아의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친구간의 우정적인 사랑이다. 세 번째로 에로스의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남녀간의 성적인 사랑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이 세 가지 사랑과 다른 것이다. 헬라어로 아가페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가리킨다. 자신을 내어주신 사랑! 왜 이 사랑이 사람의 사랑과 다른가? 사람의 모든 사랑은 다 제한적이다. 아무리 변치않는 사랑이 있대도 죽으면 끝난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은 불변할 뿐 아니라 영원하다. 그 모든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이다. 주기만 하는 사랑은 없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순수한 사랑이라도 전혀 비이기적일수는 없다는 말이다. 모두 나 중심적이다. 세상에 부모와 자식사랑만큼의 희생적인 사랑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사랑도 부모 중심적인 것이다. 자식 잘 되라고 말할 수 없는 희생을 다한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한다. 뜻한 대로 자식이 잘되면 잘된 내 자식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다. 자식 잘 키웠다는 찬사를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아가페의 사랑은 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주는 사랑이다. 조건이 없어요. 이제 본문을 보자!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만일 이 사랑 이처럼을 하나님의 사랑의 정도로 본다면 측정 불가능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땅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자체가 이해가 힘들다. 그런데 그 사랑을 헤아릴 수 있도록 설명해 주셨다. 그게 무엇인가? 독생자를 주셨다. 외아들이다. 그 외아들을 주셨다. 옛날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때 여러 자녀를 둔 가난한 집에서는 그 중에서 하나를 부잣집으로 양자나 양녀로 보내기도 했었다. 그리고는 그 대가로 돈이나 전답을 사례로 받기도 했다. 아들 딸 호강시키고 잘 기르겠다니.. 아들 딸 위해 그런 결심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주시고 세상에서 받으신 것이 없으시다. 아들! 호강시키려고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들에게 내어주신 것도 아니다. 조건이 없이 주셨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어요. 그런데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 속에는 더 깊은 뜻이 있어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이 아니다. 14절이 그 뜻을 밝혀준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무슨 말씀인가?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때 그 백성들(민 21:4-5) 물도 없다. 음식도 만나밖에는 없다.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께 불평할 때 하나님께서 불뱀들로 백성들을 물게 하니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이 죽었다. 모세가 하나님께 그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그것을 쳐다본 자는 살게 하셨다. 그러니까 여기서 인자 예수님이 들려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린 자가 쳐다보면 살았던 장대에 높이 달린 구리뱀처럼 될 것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실 것을 가리켰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외아들 예수님을 죄인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신 사랑이다. 죄의 제물이 되게 하신 사랑이다. 십자가의 사랑이다.

Ⅱ.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세상이다. 그러니 큰사랑이다. 그런데 세상이란 말은 그 뜻이 다양하다. 요한복음에 세상이란 말이 54회나 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대체로 7가지로 다른 의미로 세상을 쓰고 있다. ① 우선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의 세계다 ② 또 사람이 중심이 된 인간 세계(1:10) ③ 사탄이 지배하는 죄악 세상 ④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 세계 ⑤정치와 국가 단위의 세계(18:36) ⑥그러나 여기서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으로서 세상을 말씀한다(1:29).
구원의 대상으로서 세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세상에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 구원받을 사람이다. 따라서 사탄의 지배에서 자유케 된 자요 불신 세계와는 구별된 자요 구원으로 택함 받은 자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신 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자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사람들이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크기와 높이와 깊이를 우리 좁은 머리로 다 헤아리기 힘들다.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지으셨고 그 모두를 다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45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제한이 없으심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모든 사람, 모든 동물, 식물까지를 사랑하시며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과 양식을 주신다. 이 일반 은총은 제한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는 만인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은 만인이 아니다. 물론 세상이다. 제한이 없다. 유대인, 이방인의 백인, 흑인, 남자, 여자, 노인, 아이,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 못 배운 자 차별하지 않으신다. 세상 모든 나라 모든 인종 중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 예수님께 주신 자 결국은 예수를 믿어 구원받을 자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 오늘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 대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요 하나님께 그렇게 소중한 존재다.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시다.

Ⅲ.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멸망치 않고,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께서 세상에 아들을 보내실 때는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구원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예수를 믿게 하지 않으신다. 자유의지를 주셨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의지로 예수를 구주로 선택하고 믿는다. 물론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기쁘게 자원해서 믿는다. 안 믿는 자, 자의로 믿지 않는다. 그런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심판을 위함이 아닐지라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을 배척했기 때문이다. 다른 길이 없다. 왜 배척하나?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려면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는다. 죄가 없다고 해요. 죄인이 아니라는데 왜 죄에서 구원이 필요한가? 왜 구주가 필요하겠나? 그래 예수를 안 믿는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믿지 않는 저들의 죄의 실상을 밝히고 있다. 저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 믿고 교회 나와 보세요. 죄사함 받았다. 그러나 전에 죄로 생각되지 않던 것까지 죄임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양심이 민감해 진다. 밝아진다. 깨끗이 청소한 방안에 앉아 있어보라! 기분이 상쾌하고 좋다. 그러나 아침 햇살이 창틈을 통해 들어와 방안을 밝혀보라. 수도 없이 많은 먼지들이 유영을 하듯이 떠돈다. 빛되신 예수님께 나오고 믿기가 싫다. 예수님께 나오면 모든 죄사함 받으나 역시 죄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 진다. 전에 죄로 안 보이던 것이 죄로, 적게 보이던 것이 크게 보인다. 회개해야 한다. 그것이 싫다. 그래 안 믿는다. 그러나 안 믿으면 심판이 있을 뿐이다. 이성봉 목사님이 6.25전에 목포에서 목회 하실 때 신문사 사장의 첩이 예수 믿고 교회 나온다. 말씀 듣고 나니 첩이 된 것이 죄였다. 회개하고 사장을 떠났다. 신문사 사장 죄가 드러나니 싫다. 목사님 모함한다. 신문에다 목사는 연애 대장인가? 어려움을 겪게 됐다. 죄 드러날까 안 믿는다. 이는 마치도 몸에 중병의 증세가 있는 사람이 병원에 의사에게 찾아가지 않는 것과도 같다. 중병임이 밝혀지는 것이 싫다. 두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진찰 받고 병이 밝혀져야 치료가 가능하다. 수술할 때 하고 죽을 때 죽더라도 미리 알고 고민하기가 싫다. 아니 두렵다. 최근에는 의술의 발달로 body scan 촬영을 한다. 그러면 지금 내 몸에 이상만 아니라 앞으로 폐가, 심장이, 뼈가, 혈관이 어찌 될지 증상을 판독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비판적이다. 꼭 그렇게만 될 것은 아닌데 왜 미리부터 알고 염려하고 근심하게 하나? 하지 말자! 그러나 그럼에도 할 수 있다면 해서 예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믿고 용서받아 구원받지 못하면 그것은 암과도 같아서 마침내 우리의 생명을 빼앗고야 만다.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내가 죄인인 것만 인정하면, 그리고 주님께 나오면 누구든지 구원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고 영생 얻은 자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나? 요한일서 5장 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이다. 에베소서 1장 6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 사랑하는 방법을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신 것은 값없이 거저 주신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 예배하기 위함이라 하셨다. 전도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봉사하고, 십일조 드리고 이것이 다 하나님 사랑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 중에 사랑은 예배다. 예배를 드리면 그 성도의 하나님 사랑의 정도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대한 은혜가 있는지 감격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예배는 쉽지만은 않다. 바쁘다. 피곤하다. 사업 때문에, 손님들이 찾아와서... 그러나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만 있으면 주일예배, 주 중 예배도, 힘들지 않아요. 하나님 사랑만 있다면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이 있다면... 여러분! 시편 84편에서 구약의 성도는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한 나머지 나의 몸이 쇠하였다. 주의 전에서 하루가 다른 곳에서 1000날 보다 나았다. 저는 차라리 하나님의 전의 문지기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고백이다. 여러분 모두 모이기를 힘쓰는 예배로 하나님을 더 가까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란다.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어떻게 사랑하나? 병든 자를 돌아본다. 가난한 자 구제한다. 손님대접 잘 한다. 그러나 이것이 없으면 구원받은 성도의 이웃사랑이 아니다. 사람 사랑 중에 사랑은 전도다. 영혼구원이다. 1901년 9월에 한국에 와서 일제의 강요로 선교지인 한국을 떠나기까지 40년을 한국에서 선교한 미 북장로교 선교사 중에 William Newton Blais, 한국명은 방위량이라는 분이 있다. 그는 이북의 평양 주변 안주, 선돌, 연동, 숙천, 남칠을 중심으로 전도해서 교회를 개척하고 수십 개의 교회들을 찾아가 설교하고 가르치고 학습 주고 세례 주며 성찬식을 거행하며 돌아봤다. 한 번은 그가 안주 서쪽으로 20마일 거리에 있는 선돌에서 전도할 때다. 그때는 5마일마다 장이 섰다. 그래 장날 장터를 찾아가서 전도지를 나눠준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려고 아무리 노력했으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서종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종일 헛수고를 한 그는 한없이 서럽기도 하고 낙심이 됐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한국 사람은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시장 한 모퉁이에서 장이 파할 무렵 상자를 놓고 거기 올라가서 노래를 불러댔다. 영어로 하는 미국 노래지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래를 마치고 전도하려 하는데 누군가가 저 놈 예수믿는 놈이야 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거기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즉시 그의 곁을 떠났다. 집으로 흩어진다. 관목아래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무라도 좋습니다. 여자든 남자든 어린아이든 마음 문을 좀 열어 주세요. 마을 변두리에 작은 집을 세냈다. 그리고 사람들을 지켜보는데 아이들만이 호기심에 자기를 따라다닌다. 이 아디들에게 전도하자. 어떻게 하든지 방으로 들어오게 하자. 그러나 아이들이 두려워한다. 미국 잡지책에서 그림을 보여준다고 꼬여서 들어왔는데 여차하면 도망치려고 다 문 쪽에 앉았다. 그는 왜 내가 미국에 서 한국에 왔는지? 한국 사람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어서 알게 하기 위해 왔다. 예수님 십자가가 사랑 전하니 박영기라는 아이가 하나 예수 믿기로 했다. 그 아버지 서당의 훈장이요 완고했다. 아들은 머리를 깎고 예수 믿겠다. 집에서 나가던지 예수를 믿지 말던지 하라. 결국 집을 나가 교회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신앙생활 했다. 신앙으로 잘 성장하고 사업도 하니 아버지 아들 데리러 왔다. 그리고 아버지도 믿었다.
여러분! 왜 무엇 때문에 고향, 친척, 부모 형제를 떠나 물설고 낮선 적은 나라 한국을 찾아왔나? 얼마나 고향이 그립고 얼마나 부모형제가 보고 싶었겠나? 왜 그렇게 외국인에게 어려운 한국말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고생하며 배웠나? 외국인 보면 서양귀신이다 라고 돌을 던지고 싫어하고 오해하는 사람들! 발이 부르터라 찾아다니며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목이 터져라 외쳤는가? 왜 반응이 없으면 안타까워하고 울면서 마음 문 열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나? 왜 한 사람이라도 더 모아놓고 전도하려고 상자 놓고 그 위에 올라가 노래까지 불렀는가? 왜 안락한 문명한 삶을 포기했는가? 왜 청춘을 이 땅에서 바쳤는가? 왜 생명의 위험도 돌아보지 않았는가? 하나님 사랑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 사랑 때문에, 내가 받은 하나님 사랑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 사랑의 전도로 오늘 우리 하나님 사랑 깨닫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다. 하나님 사랑의 대상되고 사랑 받았다 우리도 잊지 말자. 십자가의 사랑 잊지 말자. 날 구원하신 하나님. 경배하고 찬양하며 멀리 가서 외국사람 구원하지 못해도 내 집 근처 다니면서 하나님의 사랑 힘써 전하자. 여러분! 하나님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예배와 전도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